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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志 (인간학)

蜀나라의 멸망.

                                                                     범상한 톱은 조직을 망친다.

 

                                                        諫言을 받아들이지않고 항복하다.

 

 

 

 

제갈공명이 죽은후.촉나라의 원정군이 철퇴하고 나서 얼마동안

 

사마중달은  장안에 머무르면서 촉나라의 움직임에 대비하고있

 

었읍니다.그후.전공에의해 태위(太尉)라는 무인으로서의 최고의

 

 

 

관위(官位)를 받았으며.안국향후(安國鄕侯)로 봉해져 나라의 최

 

고 원로로서 중용되었다.239년 명제가 죽고 태자방(芳)이 겨우 8

 

세로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그 사이에도 권모술수에 능한사마중

 

 

 

달은 온갖 수단방법을 구사해서 정적(政敵)과비판자를 차례차례

 

로 숙청해 나갔다.이렇게하여 251년에 그가 73세로 죽을때는.위

 

왕조는 사실상 사마일족의 손에 쥐어 있었다.사마중달 다음에는

 

 

 

사마사(司馬師).사마소(司馬昭)로이어졌는데.그들도 아버지의 유

 

훈(遺訓)을 계승하여 위왕조의 권력을 독차지 했다.265년에 위나

 

라의 마지막 황제인 원제(元帝)는.선양(禪讓)의 형식으로 황제의

 

 

 

자리를 사마중달의 손자인 사마염(司馬炎)에게 물려주었고.이로

 

써  진(晋)이라는 왕조가 생겼다.사마염은 이왕조의 진짜 창시자

 

는 할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사마중달에게 선제(先帝)라는 황제로

 

 

 

 서의  시호(諡號)를  붙였다. 촉나라는 이보다  2년전에 멸망했다.

 

제갈공명이  죽은후 군사면에서는 그 제자가되는 강유.내정면에

 

서는그가 극력 추천한 장완(蔣琬).비위(費褘)의 삼총사가 나라를

 

 

 

떠받들고 있었다.이 세사람은 전략가및 정치가로서는 당대 일류

 

의 인물이었다.그중에서도 특히 강유는 제갈공명이 유업을계승

 

하여  자주 위나라 영토를 출격해서 공격을 최대의 방어로 삼고

 

 

 

있었다.그런데 어쩔수없이 아두(阿斗)는 어리석은 2대째여서 모

 

 처럼의  훌륭한 인재를 보람있게  쓰지를 못했다.263년서부국경

 

 이  촉나라의  강유에 의해 자주 위협당하는데 화가난 사마소는.

 

 

 

장군 등애(鄧艾)에게 3만명의 기동부대를 주어 강유가버티고 있

 

는  한중을  피해 크게 우회하여 동남쪽에서 성도를 기습 공격케

 

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위군에.군사력이 허술한  성도는 큰 혼란

 

 

 

에 빠졌다.기절 초풍을 한 유선은 즉각 항복을 자청하려 했다.그

 

러자 아들인 북지왕(北地王)유심(劉諶)이 반대했다."설사 당하지

 

는 못할지라도 최후의 일전을 벌여 성을 베개삼아 죽을때까지 싸

 

 

 

워야 합니다.쉽사리 항복하다니 당치도 않습니다.그렇게 하면 저

 

승에서 할아버지를 뵈올 면목이 없단 말입니다.그러나 유선은 상

 

대하지않고 성문을열고 백기를 세운후투항했다.유심은 할아버지

 

 

 

유비의 무덤앞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톱의힘이 모든것을 결정한다.

 

 

 

유선일행은 포로가되어 위나라 서울로 끌려갔다.어느날

 

사마소는 잔치를 베풀고 유선을 위로했다.유선의 부하는

 

모두 먼  이국땅에  포로로 잡혀와 창피를 당하고 있는것

 

 

 

을 부끄럽게 여기고 조금도 웃지않았다.유선혼자만은 기

 

뻐하면서 떠들어대고 있었다.이것을본 사마소도 어이가

 

없어서 측근인가충(賈充)에게 속삭였다.전부터 저사람이

 

 

 

멍청이라는 말을 듣고 있었지만 이정도 일줄은 미처몰랐

 

다.이래가지고는 설사 제갈량이 살아 있었다 하더라도 촉

 

을 보전할수가 없었을것이다.그러자 가충은 말씀하신 대

 

 

 

로입니다.그렇지만 만약 유선이 저런 멍청이가 아니었다

 

면 아무리 영명하신 폐하시더라도 촉나라를 간단히 멸망

 

시킬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하고 대답했다.지

 

 

 

리(地利)와  생산성.혹은 인재의 면에서만 보아도 당시의

 

촉나라는 비록 영명한 승상 제갈공명이 죽고 없었지만 위

 

나라와  오나라에비해결코 손색이 없었다.아깝게도 톱인

 

 

 

유선이너무나도 믿음직 스럽지 못했다.그러기 때문에 망

 

한것이다.그후 유선이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사서에도 기록이 일체 없다.불쌍하다면 불쌍하지만 죽음

 

 

 

 을 기록할 가치도보람도 없는 바보 임금이었다는 것이다.

 

기업이든  나라든 톱이  범상(凡常)한곳은.설사 중역이나

 

장관이 아무리 우수하더라도.또 개개의 사원이나 국민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망한다.촉나라

 

의 멸망은 그좋은 예라고 할수 있다.

 

 

 

 

 

 

 

이렇게  해서 황건의  난이래  약1백년동안에 3개의 왕조가

 

성립되었으며.그리고 망해 버렸다.중국의 긴역사로 본다면

 

위.오.촉의 흥망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의 꽃" 에 지나지 않

 

 

 

았다. "나라는망했지만 산천은 옛모습 그대로있다. 수많은

 

영웅호걸들이.혹은 꿈을 다 이루지못한채 사라져갔고 혹은

 

풍운의 뜻을 이룬뒤에 남겨진것은  유구(悠久)한 중국의 산

 

 

 

천과 인간학의 노 하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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