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상한 톱은 조직을 망친다.
諫言을 받아들이지않고 항복하다.
제갈공명이 죽은후.촉나라의 원정군이 철퇴하고 나서 얼마동안
사마중달은 장안에 머무르면서 촉나라의 움직임에 대비하고있
었읍니다.그후.전공에의해 태위(太尉)라는 무인으로서의 최고의
관위(官位)를 받았으며.안국향후(安國鄕侯)로 봉해져 나라의 최
고 원로로서 중용되었다.239년 명제가 죽고 태자방(芳)이 겨우 8
세로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그 사이에도 권모술수에 능한사마중
달은 온갖 수단방법을 구사해서 정적(政敵)과비판자를 차례차례
로 숙청해 나갔다.이렇게하여 251년에 그가 73세로 죽을때는.위
왕조는 사실상 사마일족의 손에 쥐어 있었다.사마중달 다음에는
사마사(司馬師).사마소(司馬昭)로이어졌는데.그들도 아버지의 유
훈(遺訓)을 계승하여 위왕조의 권력을 독차지 했다.265년에 위나
라의 마지막 황제인 원제(元帝)는.선양(禪讓)의 형식으로 황제의
자리를 사마중달의 손자인 사마염(司馬炎)에게 물려주었고.이로
써 진(晋)이라는 왕조가 생겼다.사마염은 이왕조의 진짜 창시자
는 할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사마중달에게 선제(先帝)라는 황제로
서의 시호(諡號)를 붙였다. 촉나라는 이보다 2년전에 멸망했다.
제갈공명이 죽은후 군사면에서는 그 제자가되는 강유.내정면에
서는그가 극력 추천한 장완(蔣琬).비위(費褘)의 삼총사가 나라를
떠받들고 있었다.이 세사람은 전략가및 정치가로서는 당대 일류
의 인물이었다.그중에서도 특히 강유는 제갈공명이 유업을계승
하여 자주 위나라 영토를 출격해서 공격을 최대의 방어로 삼고
있었다.그런데 어쩔수없이 아두(阿斗)는 어리석은 2대째여서 모
처럼의 훌륭한 인재를 보람있게 쓰지를 못했다.263년서부국경
이 촉나라의 강유에 의해 자주 위협당하는데 화가난 사마소는.
장군 등애(鄧艾)에게 3만명의 기동부대를 주어 강유가버티고 있
는 한중을 피해 크게 우회하여 동남쪽에서 성도를 기습 공격케
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위군에.군사력이 허술한 성도는 큰 혼란
에 빠졌다.기절 초풍을 한 유선은 즉각 항복을 자청하려 했다.그
러자 아들인 북지왕(北地王)유심(劉諶)이 반대했다."설사 당하지
는 못할지라도 최후의 일전을 벌여 성을 베개삼아 죽을때까지 싸
워야 합니다.쉽사리 항복하다니 당치도 않습니다.그렇게 하면 저
승에서 할아버지를 뵈올 면목이 없단 말입니다.그러나 유선은 상
대하지않고 성문을열고 백기를 세운후투항했다.유심은 할아버지
유비의 무덤앞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톱의힘이 모든것을 결정한다.
유선일행은 포로가되어 위나라 서울로 끌려갔다.어느날
사마소는 잔치를 베풀고 유선을 위로했다.유선의 부하는
모두 먼 이국땅에 포로로 잡혀와 창피를 당하고 있는것
을 부끄럽게 여기고 조금도 웃지않았다.유선혼자만은 기
뻐하면서 떠들어대고 있었다.이것을본 사마소도 어이가
없어서 측근인가충(賈充)에게 속삭였다.전부터 저사람이
멍청이라는 말을 듣고 있었지만 이정도 일줄은 미처몰랐
다.이래가지고는 설사 제갈량이 살아 있었다 하더라도 촉
을 보전할수가 없었을것이다.그러자 가충은 말씀하신 대
로입니다.그렇지만 만약 유선이 저런 멍청이가 아니었다
면 아무리 영명하신 폐하시더라도 촉나라를 간단히 멸망
시킬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하고 대답했다.지
리(地利)와 생산성.혹은 인재의 면에서만 보아도 당시의
촉나라는 비록 영명한 승상 제갈공명이 죽고 없었지만 위
나라와 오나라에비해결코 손색이 없었다.아깝게도 톱인
유선이너무나도 믿음직 스럽지 못했다.그러기 때문에 망
한것이다.그후 유선이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사서에도 기록이 일체 없다.불쌍하다면 불쌍하지만 죽음
을 기록할 가치도보람도 없는 바보 임금이었다는 것이다.
기업이든 나라든 톱이 범상(凡常)한곳은.설사 중역이나
장관이 아무리 우수하더라도.또 개개의 사원이나 국민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망한다.촉나라
의 멸망은 그좋은 예라고 할수 있다.
이렇게 해서 황건의 난이래 약1백년동안에 3개의 왕조가
성립되었으며.그리고 망해 버렸다.중국의 긴역사로 본다면
위.오.촉의 흥망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의 꽃" 에 지나지 않
았다. "나라는망했지만 산천은 옛모습 그대로있다. 수많은
영웅호걸들이.혹은 꿈을 다 이루지못한채 사라져갔고 혹은
풍운의 뜻을 이룬뒤에 남겨진것은 유구(悠久)한 중국의 산
천과 인간학의 노 하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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