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공명의 위대성.
제갈공명은 청렴결백한 사람으로서 사재(私財)도 늘리지않고
황제로 부터 받은 은상(恩賞)은 모두 병사나 부하에게 나누어
주었다. 죽은후에 조사해보니 성도에 뽕나무 8백그루와 토박
한 논밭을 조금 가지고 있을뿐이었으며.저축같은 것은 없었다.
54세로 죽을 때가지 약 30년동안. 제갈공명은 유비와 그 아들
유선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가 청사(靑史)에 불멸의 이름을 남
기고 있는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1.촉나라 2대의 황제에 걸쳐 충절을 다함으로써 평천하(平天下)
라는 큰 낭만을 구하고.그것을 위해 평생을 걸었다.
2.불세출의 전략가로 적벽의 싸움. 형주제패. 촉나라의 평정.남
만제압 전후 6번에 걸친 북정으로 그 귀재(鬼才)를 유감없이
발휘 했다.또 아이디어맨으로 연노(連弩).목우(木牛).유마(流馬)
등의 과학적 기재와 장기. 팔진도등을 고안하여 병법의 연구도
많이했다.
3.신상필벌을 제일로하고 대의멸친(大義滅親)의 엄격한 리더십을
견지하는 한편. 자기 자신을 엄하게 다루고 더구나 부하에게 동
정심이 두터웠다.
역대의 사가(史家)나 중국의 민중들 사이에서 제갈공명은 일반적
으로 높이 평가 되고있다. (삼국지)의 편자인 진수는 "제갈량은
작전가로서 뛰어났지만.재상으로서도 백성을 위로하면서 공평한
정치에 마음을 기울였다.
신상필벌에 투철했으며 동정심이 있었기에 전국민이 그를 무서워
하는반면.친근감을 가지고 있었다.엄격한 정치 자세로 일관하면서
도 사람들의 원한을 사지 않았던 것은. 공평무사하고 더구나 공사
간의 구분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유감스러운것은 매년처럼 원정
을시도하면서도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이다.아마도 이것은 임
기웅변에 능하지 못해서 물러날때의 처리가 서툴렀던 탓일 것이다.
라고 적고있다."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하다."라는말은 제
갈량의 죽어서도 여전히 그만두지 않은 투지를 강조해서 말한것이
며.아마도 픽션(허구)일 것이다.사실 이런 작위(作爲)를 할수 있을
정도로 제갈공명은 불요불굴(不橈不屈)이었다. 아무리 과학만능의
세상이 되더라도 또 유물주의의 시대가 되더라도 이 정신은 존중될
것이 틀림 없다.특히기업의톱이나 조직체의 리더에게 있어서 감투
정신이야말로 그 기업이나 조직을 활성화 시키는 묘약이다.톱된자
는 "사업이 완성되기도 전에 그리 쉽게 죽을성 싶으냐?"하는 집념
을 갖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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