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주의 소설에 속하며 작가의 독특한 자의식의 세계가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이상 문학의 대표작. 매춘부인 아내에게 기생해 사는 어느 무기력한 지식인의 암울한 내면이 묘사된다. 즉 '나'라는 비일상적인 인물의 삶을 통해 삶의 무의미성을 보여준다. 주인공 '나'는 일상적인 상식의 세계를 떠나 그날 그날 그저 까닭없이, 의욕없이,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시간이나 공간의 필연적인 전환이 무시되고, 사건의 인과적 줄거리가 설정되지 않은 채 주인공의 자의식을 좇는 소위 '의식의 흐름' 수법으로 정당한 인간 관계를 상실한 현대인의 자폐스런 심리 상태를 그리면서 '날개' 라는 상징어로써 욕망의 탄생과 억압된 세계 안에서의 비극적 초월을 구현한다
제자들을 위한 줄거리
지식 청년인 '나'는 놀거나 밤낮없이 잠을 자면서 아내에게 사육된다. '나'는 몸이 건강하지 못하고 자의식이 강하며 현실 감각이 없다. 오직 한 번 아내를 차지해 본 이외에는 단 한 번도 아내의 남편이었던 적이 없다.
아내가 외출하고 난 뒤에 아내의 방에 가서 화장품 냄새를 맡거나 돋보기로 화장지를 태우면서 아내에 대한 욕구를 대신한다. 아내는 자신의 매음 행위에 거추장스러운 '나'를 볕 안 드는 방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수면제를 먹인다. 그 약이 감기약 아스피린인 줄 알고 지내던 '나'는 어느 날 그것이 수면제 아달린이라는 것을 알고 산으로 올라가 아내를 연구한다.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지도 모를 수면제― 그것을 한꺼번에 여섯 알이나 먹고 일주야를 자고 깨어나서, 아내에 대한 의혹을 미안해 한다. '나'는 아내에게 사죄하러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그만 아내의 매음 현장을 목격하고 만다.
도망쳐 나온 '나'는 거리를 쏘다니던 끝에 미스꼬시 백화점 옥상에 올라 스물여섯 해의 과거를 회상한다. 이 때 정오의 사이렌이 울고, '나'는 "날개야 다시 돋아라∼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라고 외치며 싶어진다.
제자들을 위한 등장 인물
나 : 경제적인 생활 능력의 결여되어 있고 사회 활동이 전무한 무기력한 남편. 아내의 부정과 자아 의식의 갈등을 일으켜 극히 불안한 심리적 자의식을 보이는 인물. '나'와 아내의 관계는 '닭이나 강아지처럼'이란 동물적 비유가 의미하듯 종속적 관계이다. 성적(性的) 무기력한 남편으로 아내보다 열등한 상태에 놓여 있는 남성. 아내의 부정과 자아 의식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켜 극히 불안한 심리적 자의식을 보이는 인물. 날개의 소생을 꿈꾸면서 사회로의 복귀를 시도한다.
아내 : 남편보다 우월한 존재로 종속상태에 놓여 있는 남편 위에 군림하는 가학적인 여성이다. '외출, 내객(來客), 돈'으로 알 수 있듯 아내의 직업은 창녀이다.
제자들을 위한 이해와 감상
내용의 난해함과 형식의 파격성으로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의 으뜸으로 꼽힌다.
매춘부인 아내에 붙어 사는 무기력한 '나'를 통해 자아의 분열을 그린 한국 최초의 심리주의 소설이다. 주인공 '나'의 유일한 삶의 지반이었던 아내로부터의 배반감이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그러므로,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란 그의 외침은 마지막으로 취할 수 있는 '탈출 의지'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박제(剝製)된 천재는 무기력 한 탈출 의지로 실패감을 맛보게 된다. 이 소설의 부부 관계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이다. 아내에 대한 예속자 혹은 기생적(寄生的) 존재로서 스스로의 인격적인 소유권과 시민성(市民性)이 없는 '나'에 비해 아내는 나를 지배하고 '사육하는' 위치에 있다. '외출', '내객', '돈'이란 단어들이 알려 주듯이 아내의 직업은 창녀이다. 쉽게 말해서, '나'는 '꽃'에 매달려 사는 기둥서방인 것이다. 그래서 '나'와 아내의 관계는 '닭이나 강아지처럼'이란 동물적 비유가 의미하듯 종속적인 관계이다. 이런 종속 관계는 시간과 공간의 소유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아내의 매음(賣淫) 현장이 '나'에게는 금단(禁斷)의 공간이며, 외출을 통해 아내의 가학적 감금에서 일단 풀려 나온 '나'는 다시 아내가 쳐 놓은 시간에 감금된다. 자정(子正) 전에는 절대로 집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외출 시간은 아내의 매음과 자신의 자유 방임이 묵계된 시간이다. 이러한 자정(子正)의 시간과 반대쪽인 정오(正午)의 사이렌은 강요된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전기(轉機)가 된다. 즉, 대낮의 정점으로서의 정오(正午)는 '나'의 유폐성(幽閉性) 극복과 도착(倒錯)된 아내와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전환점으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의 날개와 비상(飛翔)에의 소망은 박제(剝製)와 무력(無力)과 유폐된 시간으로부터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릴 수 있는 탈출의 욕망이며, 아내라는 구속성과 거짓됨에 맞설 수 있게 하는 진정한 자아의 확인이자 건전성(健全性)에 대한 향수이다.
<참고> "날개" 다이제스트
1. 프롤로그-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연애까지도 유쾌하오. 육체가 피로하면 정신이 맑소. 그러면 나는 위트와 패러독스를 늘어 놓소. 나는 연애 기법이 서툰 정신분일자요. 나는 여인의 반만을 향수하는 생활을 설계하며 낄낄대고 있소. 나는 인생의 제행이 꽤나 싱거웠던 모양이오. 그대도 자신을 위조하는 위트와 패러독스를 실천해 보는 게 좋소. 19세기는 될 수 있으면 봉쇄해 버리시오. 인생에 있어서 디테일 때문에 속아서 되겠소? 감정이 부동자세에 이른 포즈에 이를 때 감정은 중지됩니다. 여인은 모두 본질적으로 여왕벌이나 미망인이 아니겠소. 내 논리가 여성에 대한 모독이 되오? 굿바이.
2. 33번지 18가구는 집 모양이 똑같은 유곽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고 각 방마다 문패를 붙여 두었는데 우리 집에도 아내의 명함이 붙어 있다.
3. 18가구에서 아내가 제일 아름다워 나는 다른 누구와도 인사를 나누지 않는다. 나는 아름다운 아내에게 거북살스런 존재이다.
4. 나는 내 방이 마음에 든다. 나에게 모든 면에서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축 처져 있는 안일 상태. 즉 절대적인 상태를 좋아한다. 게다가 럭키 세븐 일곱 번째 집이라서 더 좋다. 그러나 이런 방이 장지문에 의해 둘로 나누어진 것이 내 운명의 상징임을 누가 알랴?
5. 내 방은 햇볕이 들지 않는 방이지만 아내의 방은 오전에는 햇볕이 든다. 아내가 외출하고 나면 그 방에서 돋보기 장난, 거울 보기, 그것들보다 정신적 오락인 화장품 냄새가 맡기를 즐기면서 아내의 체취를 더듬는 일에 탐닉한다.
6. 아내는 옷이 많다. 아내의 옷들, 특히 치마를 보며 그 안에 들었을 몸체와 여러 포즈를 생각한다. 나는 별 옷도 없고, 검정 속옷만 입고도 잘 논다.
7. 나는 방 안에서 사색에 잠기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궁리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아내와 의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게 성가신 것이다.
8.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밤낮없이 외출한다. 그리고 내객들도 많다. 내객이 있는 날은 나는 내 방에서 우울해한다. 그러면 아내는 돈을 준다. 그게 모이자 벙어리 저금통을 사 주었다. 나중에는 돈 넣는 일도 귀찮아 저금통에 무관심해진다. 게을러지고 싶기 때문이다.
9. 나는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지 궁리한다. 아내는 내게 밥을 주지만 불실하다. 나는 점점 말라 간다. 이불 속에서, 아내의 음식은 무엇일까, 돈을 출처는 어디일까 탐색하며 시간을 보낸다.
10. 아내의 돈이 내객들이 주고 간 것임을 깨닫는다. 내객들이 돌아간 뒤나 외출 뒤에 아내는 내게로 와 웃음을 띤다. 그 웃음 속에 스민 일말의 애수를 본다. 아내가 준 은화를 저금통에 넣는다. 나는 특별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잊을 뿐이다. 왜 돈을 주는지 의문이며 기쁨도 없다.
11. 번잡한 지구에서 한시바삐 내리고 싶다. 이런 생각 끝에 돈 넣는 일도 귀찮아져 저금통을 변소에 버린다. 아내는 이유를 묻지 않고 여전히 돈을 던져 준다.
12. 돈을 놓고 가는 것이 일종의 쾌감 때문일 것이란 생각을 하자 나는 쾌감이란 것의 유무를 확인하고 싶어진다.
13. 은화를 지폐로 바꾸어 외출을 한다. 거리의 경이로움에 젖었으나 밤이 이슥해지자 피곤이 몰려 온다. 돈을 쓸 줄 아는 기능이 상실되었음을 알고 집으로 돌아온다. 방에는 아내와 내객이 있다. 나는 그들을 통과해 내 방에 드러눕는다. 잠시 후 가슴이 다시 뛴다. 옆 방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럴 즈음 두 사람이 바깥에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아내의 태도에 섭섭해 하다 잠이 든다. 아내는 나를 깨우고서는 노기 띤 얼굴을 보이고 제 방으로 간다. 나는 외출을 후회한다.
14. 나는 스스로 사죄하였다. 시간이 꽤 오래 된 줄 알고 그만 방문을 연 것이라고. 누군가에게 돈을 주려 했지만 너무 복잡한 거리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고. 이렇게 혼자 사죄를 하다 아내의 방에 들어가 이불 위에 엎드리며 돈을 쥐어 준다.
15. 이튿날 잠에서 깨어난 곳은 아내의 이불 속이었다. 최초의 동침이었다. 아내는 외출을 하고 없다. 나는 아내의 체취에 흥분하면서 화장품 냄새를 맡는다.
16. 견디다 못해 내 방으로 온다. 잠을 푹 잔다. 정신이 한결 난다. 아내에게 5원을 주고 엎디었을 때의 쾌감을 말로 다할 수 없다. 내객과 아내가 돈을 주는 비밀을 알아 낸 것 같아 즐거워진다. 나는 다시 외출을 결심한다. 거리를 방황하면서 시간이 어서 지나기를 바라지만 너무 더디어 안타까워한다.
17. 자정이 지난 걸 보고 집으로 돌아온다. 도중에 아내와 내객이 이야기하고서 있는 것을 본다. 그들을 스쳐 방으로 간다. 나중에 온 아내는 뜨개질을 한다. 나는 또 아내 방으로 가 2원을 준다. 아내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를 재워 준다. 나는 기쁨에 젖는다.
18. 이튿날 아내가 나를 부른다. 맛있는 저녁밥을 같이 먹는다. 어제의 일로 호통이 있을까 하고. 두려웠지만 아내는 아무 말도 않는다. 방으로 온 나는 돈이 있어야 외출을 하고, 또 기쁨이 있을 텐데 돈이 없어 속상하다.
19. 아내가 다시 내 방으로 와 내가 우는 이유를 말한다. 돈이 없어 그럴 거라며 돈을 준다. 그러면서 오늘은 어제보다 더 늦게 와도 좋다고 한다.
20. 길을 나서서 경성역 티룸에 들른다. 아는 사람이 없어 좋고, 시계가 정확해 좋았다. 오래 앉았으니 장내를 치우기 시작한다. 거리에 나오니 비가 오고 있다. 흠뻑 젖어 오한이 난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향한다. 아내와 내객이 있었지만 너무 추운 나머지 그들을 가로질러 방으로 들어온다.
21. 이튿날 아내는 근심스런 얼굴로 나에게 약을 먹으라 한다. 나는 약을 먹고 깊은 잠에 빠진다. 이후 한 달이나 약을 먹으며 시간을 보낸다.
22. 수염과 머리가 너무 자란 것 같아 아내의 방에서 거울을 본다. 화장품 냄새가 여전히 흥분케 한다. 그러다 아달린이란 약갑을 발견한다. 나는 아뜩해진다. 지금까지 내가 먹어 온 것이다.
23. 인간 세상 모두가 보기 싫어 집을 나와 산으로 향한다. 벤치에서 아스피린과 아달린에 대해 궁리한다. 심술이 나자 아달린 여섯 알을 씹어 먹는다. 나는 잠이 든다.
24. 나는 거기서 1주일을 잔 것이다. 일어나 아달린 생각을 한다. 아내가 나를 재워 놓고 무슨 일을 한 것일까. 나를 죽이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괜한 오해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자 미안해진다. 사죄를 위해 급히 집으로 향한다.
25. 미닫이를 열다 못 볼 것을 보고 만다. 놀라 다시 미닫이를 닫고 서 있는데, 아내가 달려 나와 멱살을 잡고 물어 뜯는다. 남자가 나오더니 아내를 데리고 들어간다. 난감해 있다가 남은 돈을 꺼내 미닫이 안에 놓아 두고는 달음박질쳐 나와 버린다.
26. 싸돌아다니다가 지난 26년을 회고해 보고, 자신의 정체를 더듬어 본다. 그러나 별다른 생각이 나지도 않는다. 자신의 존재도 인식하지 못한다. 거리는 피곤으로 흐느적거리고 있다. 나도 그 흐느적거리는 세태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27. 어디로 가야 할지 방황하고 있을 때, 문득 아내의 아스피린과 아달린이 떠오른다. 아내와 나는 서로 오해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숙명으로 발이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런 대로 각기 절뚝거리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내에게 돌아가야 하나 하고 갈등하고 있을 때, 정오의 사이렌이 울린다. 갑자기 사람들이 활기차 보인다. 현란을 극한 정오다. 별안간 겨드랑이가 가려워진다. 머릿속에 말소된 희망과 야심이 번뜩인다. 나는 외쳐 보고 싶어진다. 날자,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참고> 작품 보충 해설
□ 여전히 문제인 문제작
한국문학사에서 "날개"만큼 문제를 불러일으켰고, 또 계속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작품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많은 평자들에 의해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었고,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면서 탐구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문제를 내포한 채 우리 앞에 다가오는 작품이다. 이상의 작품은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소설 또한 실험 정신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이전의 소설이 보여 주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펼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의식의 문제를 독특한 표현 기법으로 형상화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의 소설이 심리주의적 바탕에서 쓰여졌고, 표현에 있어서도 의식의 흐름이라는 수법을 따르고 있다는 그 동안의 연구 결과이다.
이 작품에 대한 견해 중, 일제의 지식인의 고뇌를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목적 의식을 상실한 지식인의 표본이 '나'이고 나의 삶을 제한하며 간간이 돈을 던져 주는 아내가 일제의 상징이며, 그 아내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지식인의 아픔과 그것을 벗어나려는 몸짓이 마지막 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시각이다. 시대와 문학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문학은 결국 시대 상황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이런 의견은 타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작품의 외적 상황이 그대로 작품 세계라고 보는 데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일단 작품의 내적 세계에 국한하여 이 작품을 살펴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리라 믿는다.
□ 닫힌 공간, 열린 공간
이 작품에서 문제 삼고 있는 자의식의 성격을 구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간의 문제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설정되어 있는 공간은 크게 '방'과 '거리'이다.
작중 화자가 거처하고 있는 방은 장지문에 의해 차단된 방이다. 본래는 하나의 방이지만 둘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하나는 화자의 방이요, 다른 하나는 아내의 방이다. 방이 나뉘어 있다는 것은, 아내와 화자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내와 화자는 동떨어진 위상을 가진 존재가 된다. 아내와 화자는 이런 면에서 대조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화자의 의식은 갈등한다. 화자는 자기 방에서 칩거한다. 반면 아내는 외출을 하거나 내객을 맞는다.
화자가 폐쇄된 공간에 처하고 있다면, 아내는 열린 공간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내에게는 사람들과의 교섭이라는 생활이 있게 되지만, 화자는 완전히 차단된 채 자신만의 삶을 살아간다. 혼자 있는 화자가 만나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 자아가 자아를 만나면 대화를 나누는 일, 그것이 자의식이다. 자의식이란 자아가 또 다른 자아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화자는 이불 속에 파묻혀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보며 나날을 보낸다. 화자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세상과 일치하지 못하는 자신의 위상이다. 세상으로 대표되는 아내와도 그는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화자와 아내는 원래 가장 가까운 사회적 관계에 있다. 그 아내와 합치될 수 없는 화자의 위상은 곧바로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단절감의 정체는 무엇일까가 문제가 된다. 화자가 아내에게서 단절감을 느끼는 이유는 아내와 한 방을 쓰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아내는 내객을 맞아 몸을 파는 창녀이다. 내객과 아내는 육체적 관계를 맺지만 화자는 그러지 못하는 것에서 연유하는 단절감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아내는 육체에 살고, 화자는 끊임없이 무엇을 궁리하며, 세상살이에 재미를 못 느끼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둘은 매우 대조적이고 이 점에서 갈등과 단절이 온다. 그런데 화자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열등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는 아내에게 부속된 존재이지 그와 아내가 대등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성적인 관계의 불균형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아내와의 실제적 접촉은 꾀하지 못하고 상상 속에서만 성적 즐거움을 느낄 뿐이다.
나는 그 중의 하나만을 골라서 가만히 마개를 빼고 병구녕을 내 코에 갖어다 대이고 숨 죽이듯이 가벼운 호흡을 하여 본다. 이국적인 센슈알한 향기가 폐로 스며들면 나는 제절로 스르르 감기는 내 눈을 느낀다. 확실히 안해의 체취의 파편이다. 나는 도로 병마개를 막고 생각해 본다. 안해의 어느 부분에서 요 내음새가 났던가를....
화자의 콤플렉스는 바로 이 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성적 능력의 결핍에서 오는 열등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는 화자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그는 아내를 무서워하는 것이다. 또한 나중에 아내의 방에서 자고 난 뒤 무한한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기 방이 어둡고, 아내 방에는 햇볕이 드는 것으로 표현한 것에서도 그 점은 분명해진다. 햇볕의 밝음은 성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화자는 어두운 방처럼 그 문제에 있어서 어두운 우울을 지니고 사는 것이다.
화자의 방과 아내 방의 공간적 괴리만큼, 집과 거리의 관계도 상징적이다. 화자는 외출을 하지 않는다. 집안에 고립되어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은 집과는 대조된 공간이다. 그 곳은 번잡함과 뭇 관계가 있으며, 활기가 있는 삶의 현장이다. 화자는 그 곳으로부터 이탈되어 있다. 이 소외는 폐쇄된 자아로 하여금 더욱 왜소하게 만든다. 화자가 거리에 나가지 못하는 한 그는 영원히 고립된 세계에 빠져 자아는 극단의 분열을 보이고 마침내 파탄에 이르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외출을 감행하고 드디어 더 넓은 세계에로 나아간다. 따라서 거리는 열린 세계이며, 외출은 자아의 칩거에서 자아의 자유로 향하는 행동의 표출이다.
□ 성에 대한 천재의 보고서
이 소설이 인간의 내면 의식을 탐구라고 했는데, 그 의도는 프롤로그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프롤로그에서의 화자와 이야기 속의 화자는 그 위상이 다르다. 그것은 어조에서 분명히 차이가 나는데, 프롤로그의 어조는 상당히 날카롭고 이지적이며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속이야기의 어조는 그와는 상당한 차이가 나 어수룩한 어투를 보인다. 그렇다면 작가는 비교적 거리가 가까운 것은 프롤로그의 화자이며, 속이야기의 화자와는 거리가 있다. 따라서 속이야기를 펼치게 된 동기를 프롤로그에서 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것은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중략] 그 위에다 위트와 패러독스를 늘어 놓소."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하나의 패러독스를 즐겨 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일 중 하나가 여인을 그려 보는 일인데, 여인의 반만을 영수(領收)하는 생활을 설계해 놓고 낄낄거려 보려고 한다. 이따금 아이러니를 실천해 보는 것도 좋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위조해 보는 즐거움을 얻으려 한다. 19세기를 청산한다는 것의 의미는 정신의 가치를 떨쳐 버리자는 것과 동일한 시각의 표현이다. 여자를 보는 안목을 '여왕벌'의 그것으로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라고 한다. 여왕벌은 수벌과 교미한 뒤 모조리 죽여 버리는 벌이다. 그런 면에서 미망인이다. 화자는 여자를 전부 미망인이라고 본다. 여자에게 남성은 수벌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다. 여자의 본질은 고매한 정신에 있다기보다 육체적 애욕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자의 반을 영수하다는 앞에서의 말은, 여자의 성만을 취해 그 생활을 탐구하겠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이야기의 핵심이 이 문제의 구체화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있어서 이 작품을 너무 턱없이 고평한 것은, 성적 문제에 국한한 이상의 의도를 너무 확대하여 해석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이 소설의 핵심은 성에 대한 하나의 보고서이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박제는 외형은 그대로지만 생명이 없는 사물이다. 화자는 자신을 박제로 규정한다. 즉 박제인 천재이다. 생명력을 상실한 지식인을 지칭하는 의미로 봐도 좋을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그는 정신주의에 매몰되어 애욕을 상실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두 개의 자아가 공존한다. 도덕이나 양심과 같은 지성적 가치 판단과 성과 욕망 따위의 생활감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분리되어 있어서 하나의 자아가 또 다른 자아와 거리를 두게 될 때 자아의 갈등은 심각해진다. 사실 이러한 의식의 분열상은 지성인에게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지성인, 즉 천재이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의식이 분열되고 갈등에 젖는 것이다.
아내는 정신이 빠져나간 육체만 있는 존재이다. 나는 아내와 일치하지 못한다. 아내와의 일치를 꿈꾸는 행위는 곧 두 개의 자아의 통합을 꾀한다는 의미이다. 정신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자아의 탈출을 의미한다. 그 자아의 탈출이 외출 행위로 표상되고 있다. 그의 외출을 살펴보면 조금씩 그 거리가 멀어진다. 첫 번째 외출은 얼마 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빨리 돌아온다. 그 다음은 시간과 공간이 조금 확대되고, 이런 과정을 거쳐 궁극에는 완전한 일탈을 꿈꾸게 된다. 이 일련의 외출을 통해 폐쇄된 자아에서 열린 자아에로 통합되어 가는 것이다. 그의 겨드랑이가 가려워지며 날개가 돋으려 하는 것은, 그가 새로운 세계로의 전이를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이것도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그 가능성이 내재했던 것이다.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죽'에서 날개가 생성된다고 하여, 그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날개를 펼치려고 한다. 자아에 깊이 감추어져 있던 자유에의 발견인 셈이다. 그것을 그 동안 억눌러 왔던 것이다. 이 억누르는 자아의 자의식이 너무 강렬해 억눌려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억눌린 자아는 말할 것도 없이 아내에게 의기소침한 자아이다. 이제 그 자아를 벗어나 욕망과 순결이 조화된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문제성은 이런 주제 의식에서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고, 의식의 흐름을 좇아 의식 세계의 내부를 해부하는 데에도 있다. 명멸하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화자의 생각은 간단없이 자유롭게 연상이 전개된다.
아스피린, 아달린, 아스피린, 아달린, 맑스, 말사스, 마도로스, 아스피린, 아달린.
이처럼 자유 연상에 의해 의식은 흘러간다. 이상이 보여 주려고 했던 것은 이렇게 내면 의식이 흘러가는 그 진경(眞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상의 "날개"는 초현실주의라는 바탕에서 인간의 의식의 본질을 치밀히 분석하여 그것의 진상을 드러내려고 한 작품이라 하겠다.
□ 큰아버지 집에서 양자 생활
이상(李箱)은 한일 합방이 되던 해 가을 서울 사직동에서 이발소를 경영하던 아버지와 일자무학의 고아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생가의 위치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 없으나 궁내부 활판소에 근무하다 활판 기계에 손가락을 잘린 뒤 차렸다는 아버지의 이발소는 운영이 신통치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상은 두 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데다가 큰아버지에게 대이을 아들이 없어 통인동 154번지의 큰아버지 집으로 옮겨 살았던 것이다. 총독부의 기술 관리였던 큰아버지 집에서의 생활은 윤택했지만 고종 때 증조부가 정3품 벼슬을 지낸 강릉 김씨 문중의 증손이 된 사실은 이상에게 적잖은 갈등을 안겨 준 듯하다. '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와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오감도" 제2호) 이상이 스물세 살 때까지 살았던 통인동 본가는 그가 "종생기"에서 '10대조의 고성'이라고 한 것처럼 꽤나 큰 한옥이었던 모양이다. 본채에 행랑채와 사랑채까지 딸린 300여 평의 넓은 집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집의 옛 모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광화문에서 사직터널 쪽으로 꺾어 300미터쯤 가다 보면 길 왼편에 상업은행 지점이 있다. 은행 왼편 골목길로 20미터쯤 들어간 곳의 오른편이 바로 이상이 이십일 년 간 살았던 통인동 154번지다. 이 집은 현재 십여 개의 필지로 분할되어 여러 채의 한옥들이 들어서 있고 길가 쪽으로는 인쇄소, 책 대여방, 열쇠 가게 등이 영업중이다. 이들 가게는 물론이고 골목안 복덕방에서도 이 일대가 일세를 풍미했던 천재 시인 이상의 옛 집터였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 '제비' 다방 : "날개"의 무대
각혈을 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된 이상은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황해도 백천 온천으로 요양을 떠난다. 그러나 이 곳 술집에서 기생 금홍을 만난 이상은 청진동 조선광무소 1층을 사글세로 얻어 '제비' 다방을 차리고 금홍을 마담으로 앉혔다. 다방 뒷골목에 금홍과 살림까지 차려 훗날 그의 대표작이 된 "날개"의 무대를 만들었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한 "오감도"는 이상을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미친 수작' '정신병자의 잡문' 등의 혹평과 비난 때문에 연재는 중단되었지만 열화 같은 찬반 양론이 일었고 '구인회' 가입 후에도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하지만 '제비' 다방은 경영난으로 폐업하여야 했고 인사동의 카페 '쓰루(학)' 광교다리 근처의 다방 '69'와 명동의 '무기(맥)'를 잇달아 개업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런 와중에도 이상은 1936년 이화여전 출신인 여류문인 변동림(이상이 죽은 뒤 수화 김환기의 부인이 된 김향안 여사)과 결혼, 새로운 인생을 맞는 듯했으나 건강 악화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등 국내에서의 암담한 현실을 뒤로 하고 혼자 동경으로 떠난다. 이듬해 2월 죽음 직전의 혼곤한 상태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일경에 체포된 이상은 신병 악화로 한 달여 만에 석방되어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부인 변동림과 마지막 해후를 했다. 1937년 4월 17일 "레몬 향기를 맡고 싶소."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유골은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보다 한 이십 일 정도 먼저 타계한 소설가 김유정과 함께 합동 영결식이 치러지고 미아리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만 이십육 년 칠 개월의 삶이었다. "날개를 펴지 못한 천재 시인" 이상을 기념하는 문학비가 송파구 방이동 보성고 교정에 세워져 있다. 보성고 동문들과 부인 변동림 여사가 1990년 5월 건립한 이 문학비는 이상의 천재성과 파격성을 강조하기 위해 추상 조각으로 만들었으며 문학비(文學碑) 앞에 이상의 얼굴 그림과 연보, 대표시 "오감도"를 새긴 시비(詩碑)를 따로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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