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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指導者. 大望

천하경륜의 대도를 세워 만세에 은덕을 베푼 강태공

 

 

천하경륜의 대도를 세워 만세에 은덕을 베푼 강 태공    
 
 
 
 

 
 십년 경영으로 3600개의 낚시를 벌리다

 태공망 여상은 지금으로부터 3000여년 전인 서기전 12세기경 사람이다. 성은 강(姜), 이름은 상(尙)이며 자(字)는 자아(子牙)로 염제신농씨의 후손이다. 그의 선조는 일찍이 사악(四嶽: 四方제후의 장관)이 되어 우임금을 보좌했으며 치수사업에도 큰공을 세운 바 있었다. 그후 그의 선조가 여(呂) 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본성은 강씨이지만 봉지 명을 따라 씨를 삼기 때문에 여상(呂尙)이라고도 불렀다.
 
 여상은 가난 속에서 곤궁하게 살며 언제나 책을 가까이하며 학문에 열중했는데 집안 살림은 부인 마씨가 맡아 뒷바라지를 했다. 하루는 마씨 부인이 들에 일을 나가면서 비가 오면 마당에 말려놓은 갱피를 거두어 놓으라고 당부를 하고 나갔다. 그후 많은 비가 내렸는데 마씨 부인이 집에 돌아와 보니 마당에 늘어놓은 갱피가 빗물에 다 떠내려가고 없었다.
 
 그런데 여상은 비가 오는 것도 모르고 책만 읽고 있었다. 마씨 부인은 더 이상 가난한 살림을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가 재가를 해버렸다. 이후에도 여상은 여전히 책을 읽거나 위수에서 낚시를 하며 사색하곤 했다.
 
 이 무렵은 은나라와 주나라의 시대로 그 전후 시대상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은나라의 조상인 ‘설’과 주나라의 조상인 ‘후직’은 모두 순임금 시대의 인물로 사도(司徒)와 농사(農師) 벼슬을 맡았는데 후에 상(商)과 태(邰)에 봉해졌다. 은나라는 설의 14대손 탕에 와서 하의 걸(桀)을 멸하고 상(商)나라를 건국했다. 이후 18대 반경(盤庚)에 가서 도읍을 은(殷)지역으로 옮기면서 은(殷)나라로 불렸다.
 
 주나라는 후직으로부터 태에 살다가 4세 공유(公劉)에 이르러 ‘빈’으로 천도하였고 13세 고공단보에 이르러 기산(岐山)아래 주원(周原)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이때 비로소 나라이름을 주(周)라 부르게 되었다. 고공단보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셋째 계력이 아들 창(昌)을 낳았는데 성덕이 있어 계력과 창에게 지위를 물려주게 되었다. 창은 서백(西伯)이라고도 불렸으며, 후일의 문왕(文王)이다.
 
 이 당시는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紂)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주왕(紂王)은 애첩 달기에 빠져 호화궁전인 녹대를 짓고 주지육림(酒池肉林)하며 향락과 사치를 일삼았고 간언하는 신하들을 포락지형(?烙之形)으로 처형하였다. 이후 민심은 떠나고 백성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한편 서백 창은 덕을 쌓고 인망을 얻어서 귀순하는 자가 많아져 날로 세력이 강해지자 주왕(紂王)은 서백 창을 유리에 감금시켰다. 이어 서백 창의 큰아들 백읍고를 죽여서 포를 뜬 다음 국을 끊여서 서백 창에게 갖다 줘서 “세상에서 서백 창을 소위 성인이라 하는데 그가 이 국을 먹으면 제 자식의 살점을 먹는 것이니 성인도 아니요, 먹지 않으면 성인이므로 죽이라.”는 계획을 세웠다. 서백 창은 눈물을 머금고 국을 먹는 시늉을 했다.
 
 한편 서백 창의 부하인 산의생, 굉요 등이 서백 창을 구해내기 위해 주왕에게 낙서의 땅과 미녀와 명마를 뇌물로 바쳤다. 주왕은 크게 기뻐하며 서백 창을 석방하고 궁시(弓矢)와 부월(斧鉞)을 하사하며 천자인 주왕을 대신하여 서쪽 제후들을 다스리게 했다.
 
 하루는 서백 창이 사냥을 나가려 귀갑으로 점을 쳐보니 사관(史官) 편(編)이 ‘얻는 것은 용도 아니요 이무기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며 큰곰도 아닌, 사냥에서 얻는 것은 인재다.’라는 점괘를 얻었다. 서백 창은 3일 밤낮을 목욕재계하고 삼가다가 위수(渭水) 상류로 사냥을 나가 위수 번계(磻溪)에서 곧은 낚시를 하고 있는 여상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서백 창과 여상은 인재의 등용의 원리, 인심을 얻어 천하를 얻고 천하를 경륜하는 방법 등에 대해 문답을 하였다. 여상의 말을 다 듣고 난 서백 창은 경의를 표하며 절하고 나서 “우리 조상 태공 때부터 머지 않아 큰 성인이 나타나 우리 주(周)족을 크게 부흥시킬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는데 당신이 바로 그분이요. 우리 태공께서 기다린 지 오래였소.” 하였다. 그 후 여상을 태공망(太公望) 혹은 태공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백 창은 태공을 자기 수레에 태워 함께 돌아가서 스승으로 모시었다.
 
 
 문왕과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열다
 
서백 창은 매일 아침 단명전에서 조회를 마친 뒤에는 각료들과 함께 치란흥망(治亂興亡)의 요체에 관한 강태공의 강의를 들었다.
 
 강태공은 서백 창을 도와 성수의 움직임을 살펴 절기와 일기에 따라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법을 가르치고, 주나라를 크게 융성하게 했으며 특히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강태공은 덕과 계책으로 제후들을 결속시켜 천하의 3분의 2를 주(周)나라에 귀속시키게 했다. 그러나 서백 창은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강태공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세상을 떠났다.
 
 서백 창의 뒤를 이어 아들 발이 무왕으로 즉위했다. 무왕은 고공단보를 태왕(太王)으로 계력을 왕계(王季)라 추존하였으며, 서백 창을 문왕(文王)으로 추존하였다.
 
 무왕 13년, 주왕(紂王)을 정벌하고자 맹진에서 포고문을 발표하고 목야에 진을 쳤다. 은나라 백성들은 밥과 물을 가지고 나와 무왕의 군사들을 환영하였으며, 주왕의 군사들은 창을 거꾸로 잡고 무왕의 군대에게 길을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은나라는 멸망했다.
 
 무왕은 은나라 수도를 점령한 이튿날 아침 몸소 사단(社壇)에 나아가 상제(上帝)께 제사를 드렸다. 이어서 무왕은 공신들을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다섯 등급으로 작위를 나누어 영토를 분배하고 제후로 봉함으로써 비로소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태공도 천하통일의 대공로로 제(齊)나라 땅 백 리의 영토를 받고 제후로 봉해졌다.
 
 
 마씨 부인을 서낭신으로 봉함
 
제나라에 부임한 강태공은 처음에는 많은 이민족의 반항을 받기도 하였지만 정치를 개선하고 풍속을 존중하고 예의를 간략히 하는 등 다스리기에 노력하여 모두가 잘 동화되었다.
 
 어느 날 강태공이 수레를 타고 시찰을 나갔다. 어느 거리를 지나는데 옛날 자기를 버리고 재가한 마씨가 들에서 갱피를 훑고 있었다. 내내 아무 것도 없는 집에 재가하여 갱피를 훑으며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강태공은 수레를 멈추고 마씨를 불렀다. 마씨는 옛일을 후회하며 다시 자신을 받아주기를 간청했다. 이에 강태공은 한번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한번 끊어진 인연은 다시 맺을 수 없다며 재가해 살고있는 마씨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고 떠났다.
 
 이후 마씨 부인은 가난하게 살다가 어느 고개 마루턱에서 죽었다. 그후 강태공은 옛날의 자기 신세를 갚기 위해 마씨 부인을 서낭신으로 만들어 주었는데, 서낭신은 마을 수호신으로 마을의 액운을 막고 잡귀를 막는 신이다. 마씨 부인이 잡귀가 되어 몇십년 살다 없어질 운명을 강태공이 근 3천년이란 세월동안 향화를 받도록 해서 지난날의 은공을 갚았다.
 
 
 귀신을 뜻대로 부리다
 
상제님께서 “강태공은 72후를 써서 귀신을 종처럼 부렸다.”(道典 4:115)고 하셨다. 강태공은 1년을 72후로 나눠(1후는 5일) 동식물 또는 기타 자연현상 변화의 징후에 근거하여 절기의 변화를 설명하고 이름을 붙여 농사에 이용하였다. 또한 강태공은 귀신도 마음대로 사역케 하는 신권을 갖추고 있었는데 중국설화 속에 많은 일화들이 전해온다.
 
 『봉신연의』에 보면 주왕의 애첩 달기는 소후의 딸로 은주역 청당에 묵을 때 곤륜산의 천년 묵은 암 여우가 그녀의 혼백을 빼앗고 그녀의 몸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주왕의 비(妃)가 되어 온갖 악행을 일삼게 되자 곤륜산에서 40년간 수행을 한 강태공이 도술로 여우를 물리치게 된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정산에 좋은 진흙이 있는데 미꾸라지 정령의 방해로 수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육로로 운송해야 했다. 이에 강태공이 신조(神釣)로 미꾸라지 정령을 잡아 수로를 내도록 하였다. 정산에는 그 증거로 조어대(釣魚臺)가 있다.
 
 그리고 『도전』에 보면 상제님께서 “봉서사의 진묵은 3둔(遁)을 하였고 주나라의 강태공은 52둔을 하였으나 나는 이제 72둔을 다 써서 화둔(火遁)을 트리라.”(道典 4:146) 하신 내용이 있다. 『봉신연의』에 의하면 강태공이 토둔(土遁) 수둔(水遁) 목둔(木遁) 등을 행하여 몸을 감추어 이동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와 같이 강태공은 도술에 능통하여 귀신도 능히 뜻대로 부리는 신권이 있었다고 전한다.
 
 
 신교의 맥을 중국 한족에 전수하다

 
주나라를 건국하는데 지대한 공을 쌓았던 강태공은 강족(姜族)으로 정통 동이족 출신이다. 강태공은 동방조선족으로서 신교의 한 맥을 중국 한족에게 전수하게 되는데, 그는 삼신 상제님의 가르침을 받아내려서 나라를 세우고 국가를 통치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삶의 좌표로 삼았다. 그의 저서인 『육도삼략』의 중심에는 동방 신교(神敎)의 가르침이 그대로 녹아있다.
 
 사마천 『사기』의 「주본기」에 보면 “무왕이 주왕을 처단하고 이튿날 아침 몸소 사단(社壇)에 나아가 남쪽을 향하여 모숙정은 맑은 물을 받쳐들고 위강숙보는 자리를 깔았으며 … 윤일은 축문을 읽어 주왕의 죄악을 상제께서 듣도록 명백히 아뢰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청수(淸水)를 모시고 상제께 고하는 부분은 동방 신교 문화의 원형이다. 또 『사기』 「 봉선서」에 의하면 “조정의 동남쪽에 태일단(太一壇)을 설하고 천일신(天一神) 지일신(地一神) 태일신(太一神)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천지인(天地人) 삼재관을 바탕으로 천일신, 지일신, 태일신으로서 삼신(三神)을 숭배한 제천행사가 있었는데, 이것이 동방 한민족의 신교(神敎)의 신관이다. 지금으로부터 8백년전 고려 공민왕 때 행촌 이암은 천일은 조화(造化)의 신, 지일은 교화(敎化)의 신, 태일은 치화(治化)의 신으로 정의했다.
 
 강태공은 산동성 제나라의 왕이 된 후 동방신교의 삼신관을 서방 중국 땅에 뿌리내렸다. 이로부터 제나라에서 삼신과 치우천황과 천지일월에 제사하는 팔신제(八神祭)풍속이 더욱 널리 성행하게 되었다.
 
 팔신제는 천지의 여덟 신을 섬기는 문화로, 삼신 상제님을 모시는 천주(天主), 지주(地主), 병주(兵主), 음주(陰主), 양주(陽主), 월주(月主), 일주(日主), 사시주(四時主) 등의 신을 모셨다. 『사기』 좥봉선서좦, 『진역유기(震域留記)』에 의하면 진시황과 한고조까지도 팔신제를 봉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팔신제는 고대 중국문화 속에 살아있던 동방신교 제사문화의 원형이며 산 증거이다.
 
 
 
병법과 정치로 천하만세에 은혜를 베풀다

 
강태공이 지은 병법서인 『육도(六韜)』는 다른 병서와 달리 치세(治世)의 대도(大道)로부터 인간학 조직학을 논급하고 정전(政戰) 및 인륜을 논한 것이 특색이다. 또한 『삼략(三略)』은 감추어져 비전 되다가 진(秦)나라 시대의 황석공이 장량에게 전수하여 세상에 드러났다.
 
 태공망의 육도가 역대 병법사상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후대의 손자(孫子) 오자(吳子) 위료자(尉?子) 이위공(李衛公) 등 중국의 제가(諸家) 병법사상도 『육도삼략』을 기간(基幹)으로 하고 있다. 전국시대에 6국의 재상을 지낸 유명한 유세가인 소진은 태공망의 병법서를 접하고 비로소 군왕들을 설득하여 천하를 경륜할 도를 터득하게 되었다.
 
 또한 상제님께서는 “강태공이 제잔금폭(除殘禁暴)의 묘략과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술법을 전수함으로부터 천하가 그 덕으로 대업을 이루었으되 그 은덕을 보답지 않고 다만 디딜방아에 동티막이로 ‘경신년 모월 모일 강태공 조작(姜太公造作)’이라 써 붙일 뿐이니 어찌 도의(道義)에 합당하리오.” 하시며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여 모든 신명이 태공의 은혜를 보답하게 되리라.”(道典 4:145) 하시며 공사를 보셨다.
 
 예로부터 잡신을 물리친다는 제살(除煞)의 한 풍속으로 디딜방아를 짓고 나면 흔히 몸체에, 강태공이 태어났다고 하는 연월일시인 ‘경신년(庚申年) 경신월(庚申月) 경신일(庚申日) 경신시(庚申時) 강태공 조작(姜太公 造作)’이라고 쓴다. 이를 ‘방아상량’이라고 하는데 디딜방아를 고치거나 새로 놓을 때는 반드시 경신일 경신시에 맞추어 방아 동티(귀신을 노하게 하였을 때 받는 재앙의 하나)를 막고자 하였다.
 
 이는 강태공을 내세워 잡귀가 덤벼들어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데, 우주원리로 보면 금극목(金克木)의 상극(相克)원리로 강한 금기(金氣)를 지닌 경금(庚金)과 신금(申金)으로써 목기(木氣)에 의한 동티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강태공은 160살을 살다가 죽었다. 80년은 초야에 묻혀서 가난하게 살았고 80년은 세상에 뜻을 펼치며 영광스럽게 살았다. 그래서 강태공의 삶을 두고 ‘궁팔십(窮八十) 달팔십(達八十)’ 이라고 한다. 강태공이 죽자 그를 장사를 지내려 하는데 사체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여상은 시해선(尸解仙)이 되었다고 믿었다. 또 일각에서는 『육도』라는 여섯 권의 병법서를 남기고 세상을 뜨자 영구(營丘)에 장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상제님께서는 강태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강태공이 십년 경영으로 삼천육백 개의 낚시를 벌렸음이 어찌 한갓 주(周)나라를 일으켜 봉작(封爵)을 얻기 위함이었으랴. 이를 널리 후세에 전하려 하였음이니라.”(道典 4:145) 강태공이 80평생을 가난 속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마음을 닦으며 위수에서 10년 동안 삼천육백 개의 낚시를 벌려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바로 후세에 천하사를 하는 심법을 전수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강태공의 이러한 삶은 상제님 일꾼들이 과연 어떠한 마음으로 천하사에 임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보게 한다.
 
 『도전』을 보면 상제님께서 “내 종자는 삼천년 전부터 내가 뿌려놓았느니라.”(道典 3:276)는 말씀을 하셨다. 3000여 년 전 강태공의 삶을 통해 후천 오만년 새 역사를 여는 우리는 지금 어떠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지를 돌이켜 보자.
 
 
 

 

 

 

孔俯漁舍詩卷>

柳陰密成幄, 黃鳥送好音.

幅巾步回渚, 沙白水淸深.

問君何爲者, 不憂世紛侵.

潔身富春志, 濟世磻溪心.

乾坤一竿竹, 氣味古猶今.

<공부의 낚시쉼터에서>

버드나무가 우거져 장막 그늘을 이루고,

꾀꼬리는 예쁜 노랫소리 들려주는구나.

두건을 쓰고서 물가를 둘러보니,

흰 모래에 맑은 물이 깊기도 하다.

묻노니 그대는 대체 누구인가,

어지러운 세상 마음을 두지 않는다.

엄자릉의 뜻으로 몸을 깨끗이 닦고,

강태공의 마음으로 세상을 구제한다.

천지에 오직 낚싯대 하나 들고 있으니,

예나 지금이나 취미에는 변함없구나.

-이직 [李稷, 1362~1431]

 

 

 

어지럽고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난국을 헤쳐 나갈 길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오랫동안 일그러진 모습으로 우리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한 지혜로운 사나이를 만나보라. 3천년 동안 한시도 우리 곁을 떠난 적 없지만 그렇다고 한시도 마음의 중심에 서 본 적 없는 강태공이라는 인물을.



<강태공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통념의 괴리를 파헤치며 3천년의 시간을 종횡무진하는 고증적 자료 탐구와 상상력이 결합된 지적여정.>


『낚시, 여백에 비친 세상』에서 낚시를 통해 정치와 사회, 자연과 삶을 바라보았던 저자가 3천년 전의 과거에서 오늘에 이르는 강태공에 대한 진실과 허상을 밝히고 있다. 저자는 다른 여가 생활과 별개로 낚시라는 여가에 은연중 담긴 무게와 중압감을 오늘날 흔히 낚시꾼을 일컫는 강태공이라는 인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그 인물의 실제 모습을 밝히고자 한다. 그러면서 강태공에 대한 선입관이 결국 오늘을 사는 우리의 자화상은 아닌가 묻고 있다. 일종의 대박에 대한 환상과 낚시터에서 유유자적했던 강태공의 이미지는 결국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허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선비의 은거 생활에 큰 부분을 차지했던 낚시와 시를 통해 그들의 참모습을 분석하기도 하고 오늘날의 정치인들과 결부된 낚시문화의 기원을 추적하기도 한다. 또한 낚시에 대한 시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실제 모습이나 현대사에 낚시칼럼으로 유명했던 김동길씨와 3김 등 현재 정치판의 낚시풍경도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 강태공이라는 인물이 3천년 동안 우리 속에 어떻게 배어들어있으며 우리 모습 속에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추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마치 한편의 교양소설을 읽듯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저자의 글쓰기에서 정치경제적 격변기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반추하게 하고 삶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이지 자문하게 한다.


<강태공, 국가 CEO인가? 낚시터 풍류객인가? 우리 안의 강태공 그 진실과 허상>


이 책은 강태공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통념을 깨뜨림으로써, 그의 올바른 지혜를 살려내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특히 오늘날 강태공은 출중한 낚시꾼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진정한 의미의 낚시꾼이 아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강태공은 낚시꾼이라기보다는, 정치사상가 혹은 직업 정치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진면목은 낚시를 잘 하는데 있지 않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천하를 평정한 지혜에 있다. 그는 오늘날로 치면 국가전문경영인인 셈이다. 저자는 강태공에 관해 잘못 알려진 것들을 바로잡아, 그의 참된 지혜를 다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강태공. 그는 무언가 큰 것을 단번에 낚아냈다는 심상으로만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 그는 속물화된 우상으로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다. 주나라 문왕이라는 지존을 낚았고, 천하를 낚아낸 인물로 우리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낚시꾼으로 통한다. 그것이 오늘날 뭇사람들이 생각하는 강태공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낚시꾼이 아니다. 그는 3천년의 기나긴 세월이 지나도록 퇴색될 수 없는 향기로운 지혜를 남긴 철학자요 사상가요 직업정치인이다. 그는 육도(六韜)와 삼략(三略)이라는 자신의 큰 사상체계를 오늘날까지 세상에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큰 것 한방’을 터뜨리는 요행의 화신쯤으로 천박하게 세속화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속물적인 시각으로 그를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속물화의 한가운데는 세상 흐름과 격리된 채 헛돌아가는 직업정치판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강태공과 그의 철학체계가 오늘날 왜곡되어 있거나 과소평가되고 있는 배경에는, 오랜 세월 정치권력과 유착되었던 유가 혹은 유교라는 강력한 지배이데올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태공의 정체가 올바로 드러나면 그의 지혜도 올바로 되살아날 것이다. 오늘날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는 뭇사람들에게 강태공의 지혜는 또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국가를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 인재를 어떻게 등용할 것인가, 조직의 리더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 어지럽고 험난한 세상을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저자는 강태공에게서 찾고 있다.



<강태공, 때를 기다리는 인고의 세월을 통해 기다림에 능동적 의지를 드러내다.>


시간을 흘려보낼 것인가? 시간을 낚을 것인가? 강태공은 기다림을 능동적 준비 기간으로 삼아 찾아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단 한번 만남으로 강태공은 문왕을 도와 은을 멸하고 주를 세워 세상을 평정하고 마침내 제나라 국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런데 강태공 80평생 낚시만 하다 어느 날 문왕을 만나는 행운으로 인생역전을 실현했던 것일까? 저자는 이벤트성 낚시 이면에 깔린 가족조차 부양하지 못해 아내를 떠나보내고 저자거리에서 세상사에 귀 기울이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강태공의 본 모습을 파헤친다. 빈 낚시 바늘을 담그고 있을 수밖에 없던 상황을 꼼꼼한 고증과 상상력을 통해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강태공의 기다림은 유유자적하던 여가가 아닌 치열한 인고의 준비 기간이었다고 주장한다. 


<강태공의 작품으로 전해진 『육도삼략』에 대한 저자의 현대적 해석.>


공자가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주나라를 건국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왕이 되어 공자의 조국인 노나라보다 강한 제나라를 만들었던 강태공의 사상은 우리나라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된 유가에 의해선 외면당했다. 강태공의 사상으로 알려진 육도삼략에는 사상사가 흔히 그렇듯 유가와 도가 사상과 유사한 부분들이 담겨 있으며 영향을 주고받았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도 말이다. 지배이데올로기에서 철저히 외면된 사상, 그렇지만 3천년을 살아남은 강태공의 사상을 담고 있는 『육도삼략』에 대해 저자는 타인의 삶을 책임지는 사회 지도층이든 한 가정의 가장이든 한 기업을 책임지고 있는 경영자든 한번 쯤 되돌아보아야 할 선인의 지혜중 하나로 꼽으며 현대적 해석을 가하고 있다.






<책 내용>


1장: 강태공이 살아가는 방식

오늘을 살아가는 강태공의 실상을 전하고 있다. 강태공이 누구이며 어떻게 왜곡된 삶을 살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중국 현지와 국내에 남아 있는 그의 여러 자취들을 둘러본다. 특히 강태공이 낚시로 세월을 낚았다고 전해지는 중국 위수(渭水)의 반계천(磻溪川)과, 그가 제나라의 초대 왕으로서 인생의 후반부를 화려하게 보낸 산동성 임치(臨淄)에 남아 있는 흔적 등을 전한다. 또 역사서와 설화와 풍습에 깃든 그의 모습을 낱낱이 들추어낸다.


2장: 낚시꾼 강태공의 허상

오늘날까지 낚시꾼으로 알려진 강태공의 이미지가 허상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흔히 강태공 버전의 낚시태도인 것으로 일컬어지는 ‘곧은 바늘 낚시’나 ‘빈 바늘 낚시’나 ‘사색에 잠긴 낚시’ 등은 모두 허구적이라고, 여러 문헌과 중국 현지의 실사를 통해 소상히 밝히고 있다. 오늘날 곧은 바늘과 빈 바늘은 강태공이 가진 낚시태도의 전부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런데 그가 곧은 바늘이나 빈 바늘을 쓴 적이 없다니? 강태공은 곧은 바늘이나 빈 바늘을 사용할 정도의 여유가 없었으며 실제로는 매우 절박한 심리상태에 처해 있었다. 오히려 전반부 인생을 매우 고독하고 불우하게 보낸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3장: 요란한 은거 신드롬

강태공은 낚시질로 오랜 세월 은거한 인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은거지사(隱居志士)로서, 중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오늘날까지 은거의 대명사 격으로 통한다. 하지만 그의 은거는 오늘날 적잖게 왜곡되어 있다. 그는 정말로 세상을 등지려했던 것일까? 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갖가지 허구적인 은거 신드롬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강태공 버전의 은거가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은거를 일삼았던 역사 속의 여러 인물들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규명하고 있다. 


4장: 정치판의 우상

오늘날 강태공을 둘러싼 각종 신드롬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곳이 직업정치판이다. 그래서 그의 진면목이 가장 심하게 일그러지고 뒤틀린 영역도 직업정치판일 수밖에 없다. 허위의식의 한복판에 직업정치판이 있고, 또 그 중심에 강태공이라는 허상이 똬리를 틀고 있다. 강태공이 왜 대물(大物)지향적 삶의 한복판에 놓여 있어야 하는지 이 책은 비판하고 있다. 또 툭하면 강태공의 권위와 입을 빌려 자신의 뜻을 전하려고 하는 직업정치꾼들의 군상도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사사로운 이익과 탐욕에 눈이 멀어 국가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곤 하는 이 땅의 위정자들의 태도가 강태공의 허상에 투영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역대 국가 최고지도자 가운데 낚시를 가장 좋아했던 이승만 전대통령의 낚시태도를 강태공과 결부시켜 전하고 있어 흥미롭다.


5장: 기나긴 소외

강태공이 오늘날 허상으로 남게 된 가장 큰 원인의 하나로 유가를 꼽고 있다. 공자와, 공자가 스승으로 삼고자 했던 주공과, 공자가 가장 모범적인 통치체제로 여겼던 주나라의 지배체계 등을 소개하고 있다. 주나라의 여러 제후국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힘겨루기 속에서 강태공과 그의 사상이 어떻게 소외되었는지도 생생히 전하고 있다. 특히 노나라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낸 공자가 강태공의 나라인 제나라로부터 받은 정신적 상처도 강태공이 오늘날 일그러진 모습으로 남게 된 한 원인으로 거론되고 있다. 유교라는 이념으로 굳건하게 무장한 조선의 지배체제로서는 강태공을 배척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소개된다. 


6장: 육도·삼략으로 보는 지혜

그렇다면 강태공의 참된 가치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육도와 삼략이라는 그의 저작이다. 육도와 삼략의 주요 내용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다. 특히 국가 지도자나 조직의 리더가 국가나 조직을 어떻게 이끌어가야 하는지 강태공의 저작을 빌려 말하고 있다. 강태공이 3천년 전에 설파한 지혜는 오늘날에 이르러 더욱 새로워지면서 그 참된 가치를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주나라 문왕이 사냥을 나갔는데
그날따라 한 마리의 짐승도 못 잡고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실망한 문왕이 강가를 지나가는데 웬 노인이 낚시하고 있었습니다.

문왕이 노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낚시를 즐겨 하시나 봅니다."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일을 함에 있어 군자는 뜻을 얻음을 즐기고, 소인은 이익을 얻음을 즐깁니다.
낚시질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며 지금 저는
고기를 낚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눈에 비범한 사람임을 알아챈 문왕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낚시질하는 것이 정치의 무엇과 비슷한지 말해줄 수 있소?"

노인이 다시 답했습니다.
"낚시에는 세 가지의 심오한 이치가 숨어 있습니다.
첫째는 미끼로써 고기를 낚는 것인데
이는 녹을 주어 인재를 취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둘째는 좋은 먹이로써 더욱 큰 고기를 낚을 수 있는 법인데
이는 인재에 녹을 많이 주면 줄수록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충성스런 신하가 나오는 이치와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물고기는 종류에 따라 요리법이 다르듯
인재의 성품과 됨됨이에 따라 벼슬을 달리 맡기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의 나이 72세에 처음 문왕을 만났으며,
문왕은 그를 태공망(太公望)이라 칭하며 국사로 봉했습니다.
그가 바로 세월을 낚던 '강태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