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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指導者. 大望

박정희 대통령과 독도

 

 

대통령이 목숨걸고 지킨 독도

 

"韓日 독도 공동소유 제안, 박정희가 거부"

1965년 박 전 대통령이 일축 ,,, 미 국무부 외교문서 확인

 

한일협정 당시 독도 문제로 한국과 일본이 팽팽히 맞서자 미국이 협정 체결을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한일 공동운영 등대를 독도에 설치하는 안을 제시했다가 단호하게 거절당한 사실이 최근 비밀해제된 미 국무부 외교문서에서 드러났다.

 

국무부 문서 ‘196468 미국의 외교관계 29363호에서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방미중인 박정희 대통령을 1965517일 만나 한일협정 진척을 축하했다. 이튿날 딘 러스크 국무장관이 한일 양국이 독도를 공유하며 천천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공동 운영 등대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가 박 대통령으로부터 있을 수 없는 일(Just would not work)’이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미국은 주한미군 유지비가 한일협정 타결로 줄어들기를 기대했으나 독도문제가 협정 타결에 장애물로 대두하자 독도에 이같은 관심을 보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는 로버트 W. 코머 미 국가안보위원이 1964519일 존슨 대통령과 특별보좌관 등에게 보낸 메모에서도 엿볼 수 있다.

 

코머는 우리는 한국민 2,000만명을 위해 연 3억달러를 지출하고 있지만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어떡하든 한일협정을 타결시켜 일본돈이 한국으로 유입돼 주한미군 주둔경비가 감소되도록 해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협정이 성사되도록 밀어붙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 존슨 행정부가 독도문제에 대해 한국에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그러나 워싱턴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독도문제를 한일협정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박 전 대통령의 단호한 입장은 1965615일 윈트롭 브라운 주한 미대사가 국무부에 보낸 364호 문건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브라운 대사는 문건 364호에서 독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가질 것을 제안하자 박 대통령이 만일 일본이 독도에 대해 계속 자신들의 입장을 주장하면 장관급 회담은 무의미하다. 만일 일본이 우리의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김동조 대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권을 갖고 있기에 그같은 회담은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다. 일본과의 협정 그 어느 곳에라도 독도가 언급되는 것에 반대한다는 한국의 입장은 명백하다고 재확인했다.

 

미주브레이크뉴스 / 신용일 기자 yishin@koreatimes.com

 

요즈음 "독도" 문제로 나라 안 팎이 시끄러운데 이에 대한 과거의 숨은 일화가 있어 소개 하고자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독도

 

1965 한일협정이 물 밑에서 논의되던 시기 일본 정부는 한 명의 특사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다.

 

고토 마사유키’...일본 육군사관학교의 박정희 선배이며 일본정계와 재계를 연결하던 최고의 우익 로비스트이자 다혈질적인 기질로 스스로를 그당시 일본의 쇼와 시대 최고의 사무라이라고 자칭하던 자이다. 거한의 체구와 특유의 거친 말투 그리고 매서운 눈빛으로 어떤 상대도 협박하여 설득시키고야 마는 사람이였다.

 

고토의 임무는 단 한가지였다. 생체시험으로 유명했던 일본 관동군 731부대와 관련이 있는 일본 굴지의 미도리 제약회사에서 영구한 신기술을 한국에 제공하는 댓가로 독도를 빼앗오는 것. 일본은 이 고토를 한국에 특파함으로써 독도문제는 해결됐다고 보는 낙관적인 분위기가 정계에 팽배해졌다.

 

고토는 술을 먹으면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하였다. “조선 놈들이라고 하는 것들은 근성이 없어.”

 

이런 고토가 드디어 박정희대통령과 독대하게 되었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고토였다. “사관학교 시절이나 일본군시절에 장군에 대한 기억이 나에게는 별로 없소. 아마 조용한 생도였든 모양이군요.”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당신이 나에 대한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오늘 내가 여기에서 당신과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요. 본론을 이야기 하시요.”

 

“역시 듣던 대로시군요. 우리나라 일본의 바보같은 놈들이 다케시마 같은 하찮은 문제로 우리의 발목을 붙잡을려고 하오. 조국을 부흥시킬려면 무엇보다 의약관계의 최신기술이 필요할 것이요. 내일 당장 신문을 이용해 선전하시요. 일본의 최신 기술을 이전 받기로 했고 공장도 지을 거라고 말이요. 그러면 민심을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이요. 그리고 다케시마 같은 것은 바보 같은 놈들에게 고기나 잡으라고 주어버립시다.”

 

“이봐 당신, 나는 목숨을 걸고 혁명을 한 사람이요. 나에게 명령하는 것이요?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내 조국과 함께 하기로 결심한 사람이요. 그것이 독도이던, 돌 한덩이던, 내 조국의 것이라면 나는 목숨을 걸고 지킬 것이요. 군인인 내가 조국에 할 수 있는 것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소?”

 

순간 박정희의 기세에 이 거한의 고토는 기가 질리고 만다. 수많은 야쿠자들, 수많은 정치깡패들을 상대하면서도 한번도 보지 못한 두려움을 고토는 이 작고 깡마른 체구의 사나이에게서 받은 것이다.

 

“장군 흥분하지 마시요. 장군의 조국에 대한 충정은 나도 이해를 하오. 하지만 작은 것을 보느라고 큰 것을 보지 못한 다면 그것도 장군답지 못한 것 아니요. 대의를 보시요. 자칫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소.”

 

“이봐 당신 아까부터 자꾸 나에게 훈계할려고 하는데 그 태도를 나는 용서하지 못하겠소. 당신도 사나이라면 나와 술 한잔하며 사나이답게 이야기를 합시다. 서로 술이 취해 싸움이 된다면 덜 취한자의 말을 따르기로 하면 될 것 아니겠소? 어차피 당신은 나와 싸우기 위해서 온 사람 아니요.”

 

술자리에서 박정희대통령은 고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와 부하들에게 가장 즐거운 일이 무엇인지 아시오? 이 시대 이 땅에 태어난 덕분에 우리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요. 사나이로서 이 보다 더 큰 행운이 어디 있겠소? 당신, 일본에 돌아가서 전하시오. 다들 목숨을 걸고 조국을 부흥시켜 일본 못지않는 나라를 한번 만들어 볼려고 하는데 계집애같이 앵앵거리지 말라고 말이요.”

 

이 말을 들은 고토는 웃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말았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의 면전에서 자신에게 계집애처럼 앵앵거리지 말라고 말하는 박정희의 눈빛에서 사나이의 진짜 미학을 찾았다는 유쾌함과 비장함이었다고 한다.

 

동경으로 돌아온 고토는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이, 박정희장군은 조국을 위해서 죽기로 했다고 말했소. 당신들 면상을 보아하니 어느 누구도 죽을 각오를 하고 다케시마를 찾을 수는 없겠어. 돌아가서 마누라 엉덩이나 두드리든지 아니면 긴자의 네상들이나 끼고 한잔하러 가든지...”

 

그 후 박대통령이 돌아 기시든 날, 아카사카의 한국 술집에서 술을 먹고 있던 고토는 술에 취해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고 한다.

 

“병신들...조선 놈이라고 하는 것들은 어쩔 수가 없구나. 자신들의 두목을 죽여버리면 어쩌란 말이야. 아버지와 같은 분을 말이야... ...즐거움이 없어지고 말았구나. 눈을 뜬 조선 호랑이가 자기를 괴롭힌 이런 족발이 쓰레기 같은 원숭이들을 단 칼에 베어 복수하는, 이것이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병신들...마지막 사무라이가 죽었단다..죽고 말았단다.”

 

조국의 근대화를 위하여 놀라운 수출과 경제발전으로 일본과 경쟁하였으며 핵으로 힘을 키워 보려고 했던 박정희대통령의 꿈은 마지막 사무라이가 죽고 말았다는 고토의 울부짖음과 함께 끝나고 말았지만 그래도 독도는 끝까지 지켰다.

 

6.25전쟁 혼란중에 일본은 독도에 상륙하여 우리 어부의 위령비를 파괴하고 영토 표시를 하는 등 불법 행위를 자행 함으로 1953년에 군경력이 있는 민간인으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가 창설되여 1956년 국립 경찰의 독도경비대가 주둔 할때 까지 독도를 사수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독도경비대를 보강하고 경비를 강화하였으며 1965년에 독도에 주민 1세대가 들어가 살게하여 우리의 영토임을 확실히 하였으며 독도개발을 추진하여 우리 국민이 독도를 관광하도록 하였다.

 

고토는 사랑하던 손녀를 교통사고로 잃은 충격으로 자살하면서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있던것은 박정희대통령이 써준 ‘우국충정’이라는 친필휘호가 든 수석 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