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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指導者. 大望

을지문덕 장군

 

                                                을지문덕 고구려의 장군.

 

 

                                                                                          을지문덕장군

〈자치통감 資治通鑑〉에는 위지문덕(尉支文德)으로도 되어 있다. 살수대첩(薩水大捷)을 승리로 이끈 고구려의 장군으로만 알려질 뿐, 개인과 관련된 사실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어떠한 문헌에 근거했는지 알 수 없지만, 〈해동명장전 海東名將傳〉에 그가 평양 석다산(石多山) 사람이라고 전한다. 을지문덕의 성인 '을지'에 대해서는 고구려 관등 우태(于台)와 같이 연장자나 가부장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하고, '을'만을 성으로 보기도 한다. 또 선비족 계통의 성인 '위지'(尉遲)와 을지를 같은 것으로 보아 고구려로 귀화한 선비족 계통의 사람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612년(영양왕 23) 수나라 양제는 수륙 113만에 달하는 대군을 직접 인솔하고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요동성(遼東城)에서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한편 수군(水軍)은 대동강을 거슬러오면서 정병(精兵) 4만을 선발하여 거짓 패주하는 고구려군을 쫓아 평양성 안에 들어왔다가 거의 궤멸되었다. 평양성을 직공하기로 결정한 수군(隋軍)은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于仲文)의 지휘하에 30만 별동대를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켰다.

 

이때 영양왕은 대신(大臣) 을지문덕을 보내 적진을 엿볼 겸 거짓으로 항복할 의사를 표했다. 우중문은 앞서 양제에게서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이 오면 사로잡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위무사(慰撫使) 유사룡(劉士龍)이 말려서 돌려보냈다. 우중문이 곧 후회하고 다시 오게 하려 했으나 을지문덕은 즉시 압록강을 건너 돌아왔다. 속은 것을 안 수군은 압록강을 건너 추격했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적군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알아채고 하루에도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도망가는 등 거짓으로 패주하면서 적군을 더욱 피로하게 했다. 겨우 살수(薩水:지금의 청천강)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까지 도착한 적군에게 "신비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고 오묘한 계산은 지리를 다했다. 전쟁에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원컨대 족함을 알고 그침이 어떠랴"(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라는 5언시를 지어 보냈다. 그리고 다시 사람을 보내어 철군하면 왕을 모시고 조견(朝見:제후가 천자를 찾아가는 것)하겠다고 전했다.

 

적군은 거짓임을 알면서도 군량이 부족한 데다 군사들이 지쳐 고구려군을 이길 수 없다는 판단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을지문덕은 군사를 출동시켜 사방에서 적군을 추격하면서 살수에 도착한 적군이 강을 건널 때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까지 살아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 정도였다.

 

여수장우중문시 與隋將于仲文詩

 

神策究天文이요. 妙算窮地理 . 

신책구천문       묘산궁지리

 

戰勝功旣高이니 知足願云止.

전승공기고       지족원운지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오묘한 계산은 땅의 이치를 꿰뚤었도다.

 

전쟁에 이겨 이미 공이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 바라노라.

 

뜻의 의미

고구려의 장수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양제의 명으로 고구려를 침공한 우중문에게

충고하는 내용의 시문이다.

..................

 

그리고 위 시문은 2007년 3월

한미 FTA 협상장에서 활용한 시문이며

 

현재 위기에 처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버리며 극복하려는 충신은 없고

姦臣들이 亂舞한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