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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指導者. 大望

대 막리지 연개소문

 

 

 

 

 

 

 

 

 

 

 

 

 

?~ 665(보장왕 24).

고구려 말기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재상.

〈삼국사기〉 열전에는 그의 성을 천(泉)이라 했으나 이는 당 고조의 이름자인 연(淵)을 피하여 천으로 표기한 중국문헌에 의거했기 때문이다. 그의 시조가 샘[井] 또는 물[水]에서 태어난 연유로 연을 성으로 삼았다 한다. 개소문은 개금(蓋金)이라고도 하는데 금(金)의 음(音)인 '소'·'쇠'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생각되며, 〈니혼쇼키 日本書紀〉에는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라고 기록되어 있다.

1923년에 발견된 천남생묘지(泉男生墓誌)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아버지는 태조(太祚)로 모두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했다고 한다. 동부(東部 : 또는 西部) 대인(大人)이었던 아버지가 죽자 연개소문이 뒤를 잇게 되어 있었으나 성품이 잔인하고 모질다 하여 지위를 계승하지 못하다가 귀족들에게 간청하여 겨우 승인을 받았다. 642년(영류왕 25) 천리장성 축조를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그가 아버지의 지위를 이은 뒤 흉포하고 잔인하여 귀족들이 영류왕과 비밀리에 의논하여 그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이를 먼저 간파한 그는 동부의 군사를 모아 사열하는 체하며 귀족들을 초청한 뒤 급습하여 죽였다. 그리고 궁궐로 쳐들어가서 영류왕을 살해하고 왕의 조카인 장(臧 : 보장왕)을 왕으로 옹립한 뒤 자신은 대막리지가 되었다. 이 정변에서 죽은 자가 100여 명에 달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귀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적·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그는 5개의 칼을 차고 다니며, 외출할 때는 의장대를 앞세우고 대단한 위엄을 부렸다.

 

그러나 안시성(安市城) 성주는 그에게 굴복하지 않아 연개소문이 군사를 내어 성을 쳤으나 함락되지 않자 성주의 지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할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는 매우 긴박했다. 즉 수나라를 이어 중국의 통일왕조로 등장한 당나라가 세력을 강화하여 고창국(高昌國)과 돌궐(突厥)을 멸망시키고 서서히 동쪽으로 압력을 가해오고 있었다. 고구려에서 천리장성을 쌓은 것도 이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또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신라는 당과 적극적인 연결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정권을 잡은 그는 왕에게 도교를 수용할 것을 건의하여 당나라에서 도사(道士)를 맞이하고 〈도덕경〉을 전해받기도 했으나, 대외적으로는 시종일관 강경한 노선을 견지했다. 백제의 공격으로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합천)이 함락되어 위기를 느낀 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직접 고구려를 방문하여 협상을 시도했으나 이를 거부했고,

 

당에서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을 사신으로 보내 신라에 대한 공격을 그칠 것을 요구했으나 신라에게 빼앗긴 고구려의 영토 500리를 회복하기 전에는 전쟁을 그만둘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태종은 다시 사신 장엄(蔣儼)을 보냈으나, 연개소문은 그를 굴실에 가두었다. 이에 당 태종은 644년(보장왕 3)에 연개소문의 시역(弑逆)을 성토한다는 명분을 걸고 군사를 내어 직접 고구려 침략에 나섰다.

 

고구려의 장군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이 고구려군과 말갈군으로 구성된 15만의 구원군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안시성 동남쪽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색인 : 안시성전투). 당은 요동지방에 있는 고구려의 일부 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을 포위했다. 당군은 필사적으로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안시성의 완강한 저항으로 함락에 실패하여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당에서는 이후에도 몇 차례 군사를 파견하여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태종이 철수하면서 연개소문에게 활과 의복을 보냈으나 그는 이를 받고도 사례하지 않았으며 이후 비록 당에 사신을 보내 글을 올렸지만 정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강력한 권력을 배경으로 수년에 걸쳐 계속되는 당과의 투쟁을 주도하면서 신라에 대해서도 공세를 계속했다. 그러던 중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 661년 다시 고구려를 침략해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군대가 평양성 부근까지 접근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아들 남생(男生)을 압록강에 보내 당군이 건너지 못하도록 막았으나 강이 얼자 건너온 당군에게 고구려군이 패하여 남생은 겨우 몸을 피하기도 했다. 이듬해 방효태(龐孝泰)가 이끄는 당군이 다시 침입하자 연개소문은 직접 사수(蛇水) 언덕에서 접전을 벌여 적군을 몰살시켰다.

 

그러나 그의 대외 강경정책은 고구려의 국력을 소모시키기도 했고, 그의 사후에 내부 결집력이 약화되고 정치적 혼란이 초래될 소지를 안고 있었다. 결국 665년에 그가 죽자 곧 장남 남생과 남건(男建)·남산(男産) 등 아들들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났고, 남생은 당에 투항했다. 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도 12성(城)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했고, 이들 성에는 신라군이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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