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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指導者. 大望

최영장군 역사의 라이벌 이성계에 왜 죽어야만 했나.

최영장군 역사의 라이벌 이성계에 왜 죽어야만 했나.


 

                 

 


최영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의 마지막 충신의 대표로 언제나 회자된다. "내가 평생 탐욕한 적이 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요. 아니면 나지 않을 것이다"이라는 유언과 최영의 무덤인 적분(풀이 나지 않아 붉은 흙으로만 쌓여있는 무덤)은 그의 인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대규모 왜구를 격퇴한 홍산대첩, 서경을 점령한 홍건적을 격퇴한 서경탈환 등 그의 무예와 용맹은 당시 최고였다.

 

이런 최영에겐 어쩔 수 없는 역사 속 라이벌이 존재한다. 관록의 최영과 운명적인 대결을 펼친 신예 이성계다. 혜성처럼 나타난 '신성' 이성계는 최영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뒀다. 결국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다. 최영과 이성계, 한때는 동지에서 마지막엔 적수로 만난 한국 역사 무장 최고 라이벌 중 하나다.

최영과 이성계 손을 잡다

최영과 이성계는 한때 손을 맞잡고 홍건적을 물리친 파트너였다. 이성계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점이다. 10만에 달하던 홍건적을 격퇴하는데 이성계의 함경도 군사력은 날개가 됐다.

단순히 홍건적과 왜구 격퇴에만 손을 잡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기철 일파를 몰아내는데도 합심했다. 기철은 원나라 황후였던 기황후의 오빠. 원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던 기황후였던만큼 기철의 기세도 엄청났다. 원나라에서 높은 벼슬까지 받은 터라 기철은 사실상 공민왕보다 자신이 더 위라는 생각을 가질 법도 했다.

이런 기철을 몰아내는데 최영과 이성계는 손을 잡았고 야습작전을 통해 기철 일파를 숙청하는데 성공했다.

이성계는 明파, 최영은 元파?

두 사람의 관계는 기철을 몰아낸 후 냉랭해진다. 향후 국정 운영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이는 두 무리의 국정 주도권 싸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기성 정치세력인 최영과 신진 이성계의 입장차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최영이 '보완'을, 이성계가 '혁파'를 주장한 점은 쉽게 예상되는 시나리오다. 최영의 권력기반이 기성 정치권, 이성계가 신진 군부였다는 점은 감안하자.

최영과 이성계의 대립 최고조는 요동정벌로 터진다. 명나라가 쌍성총관부 지역 영토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당시 왕이던 우왕과 최영은 무력 대응을 논했다. 선제적 공격으로 요동을 정벌, 영토는 물론 명나라의 압박을 조기 차단하자는 전략이다.

이에 반기를 든 것이 이성계다. 이성계는 "농사철에 전쟁은 옳지 않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위험하다"라는 말로 요동정벌을 반대했다.

일부에선 원나라의 최영과 명나라의 이성계 외교관이 부딪혔다고도 이야기한다. 이렇게 간단할까?

최영은 2천명의 원군으로 홍건적과 전쟁 중인 원나라를 도왔다. 하지만 최영은 전투도 전투지만 상황 파악과 분석에도 주력했다고 알려졌다. 향후 공민왕이 명나라로 무게중심을 조금씩 옮기기 시작한 것도 이 이후다. 무작정 원나라를 편드는 모양새는 아니라는 방증이다.

이성계도 마찬가지다. "작은나라가 큰나라를 치면 안된다"는 하나의 '립' 서비스와 비슷해보인다. 자신들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 혹은 '핑계'인 셈이다. 이성계는 한때 잠시나마 요동성을 쳐 함락시킨 인물이다. 고구려 멸망 후 요동성을 차지한 경험은 이성계가 유일하다. 군량부족으로 인해 곧바로 철수했지만 이성계는 이미 요동정벌을 성공시킨 인물이다. 또 이성계의 '브레인' 역할을 한 정도전이 조선건국 후 요동정벌을 추진 한 점은 이성계가 사대주의 혹은 명나라 우대로 요동行을 반대한 것은 아닌 듯 보인다.

정치상황을 보자. 기성정치권인 최영이 원나라에 기운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고려의 왕들은 세자 시절 원나라로 넘어가 사위가 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자란 후 왕위에 오를 때 돌아온다. 몽고인들은 상속부터 지위까지 첫째 아들부터 딸, 사위까지 동등한 위치다. 같은 원나라 황실의 가족이다. 많은 권력가들로 인한 왕권 추락을 봐온 최영은 '남'인 명나라보다 '가족'인 원나라 황실이 국가 안정에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판단했을 터다.

이성계는 반대다. '재야세력'인 신진 군부와 사대부들이 지지세력인 이성계는 주도권을 잡기 위해선 기성세력을 떨궈내야함은 당연하다. 원나라와의 외교, 지지로 커온 기존 정치세력을 밀어내기 위해선 명나라를 중시할 수 밖에 없다. 원나라를 제압하기 시작한 명나라는 이성계 세력에게 무엇보단 큰 무기가 됐을 터다.

단순히 사대주의 혹은 외교관을 넘어 복잡한 정치구도와 세력싸움을 이해해야 두 사람의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나라를 더 중시하느냐는 수백년이 지난 대한민국 정치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대목 아닌가.

            최영의 죽음, 최영의 독선 때문이다?


      


최영은 결국 이성계와 싸움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죽임을 당했다. 위화도회군이 '키'가 됐다. 요동정벌군은 출정했지만 압록강에서 회군했다. 폭우로 압록강을 건널 수 없었다. 정벌군 이성계와 조민수는 회군을 간곡히 부탁했지만 우왕과 최영은 오히려 하사품으로 이들을 독려했다. 이성계가 새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은 이때 확실히 자리잡았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말 안통하는 나라와 왕에겐 희망이 없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회군한 이성계는 그 군사로 최영과 우왕을 밀어낸다. 최영의 주위엔 별다른 군사력이 모이지 않았다.

사극 속 최영은 부하들의 존경을 받는 무장으로 그려진다. 실상 그랬을까? 위화도회군의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우왕이다. 우왕은 최영을 끝내 붙잡았다. 요동정벌을 이끈 장본인을 오히려 배제한 셈이다. 신진군부는 왕실과 조정에 대한 불만으로 넘쳐났다. 이들에겐 "왜 최영이 빠졌나"는 의문이 드는 건 당연하다. 기득권이 자신들을 전장으로 내몰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닌가라는 두려움도 들었을 법하다. 우왕은 최영이 없는 틈을 타 반란 등이 일어날까 두려워 최영을 붙잡았다.

최영의 군대 장악력 혹은 유연성이 비판받는 부분이다. 최고 무장으로 추앙받던 최영이다. 이런 최영이 군부에게 버림을 받았다. 이성계가 회군을 결정한 후 거의 모든 장수와 군사들이 최영이 아닌 이성계를 따랐다. 최영이 부하나 동료 장수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한 점은 최영의 인간 관계가 사극 처럼 따듯하진 못했을 수도 있다는 추론을 생기게 한다.


        


하지만 최영은 지금도 존경받는 위인이다. 그의 적분은 아직도 최영을 존경하게 만드는 상징물이 됐다. 라이벌인 이성계에 결국 제거됐지만 오히려 이는 "마지막 충신"이라는 존경을 더하게만 했다. 최영이 보여준 '불꽃' 인생이 현시대 사람에게도 큰 숙연함을 주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