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 최영 장군
최영장군은 1316 년 - 1388년 고려말의 명장이다 유교사 대부와손을잡은
이성계와 대립하다가 위화도 회군이후 권력에서 밀려난후 귀양지인 고양
에서 충주로 옮겨 졌다가 다시 개경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그해 12월 순국
옥에서 죽임을 당했다.
본디 청렴 하기로 소문난 최영장군은 죽기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에 단 한번이라도 부정한 짓을 저질렀
다면 네 무덤에서 풀이 날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결코 풀이 돋지 않을 것
이다.
그런데 그의 무덤은 유언대로 정말 풀이 나지 않았다가 이후 억울함이 풀
렸는지 1976년 부터는 무덤에서 풀이 조금씩 나기 시작 했다고 한다.지금
도 무덤에는 적토가 보이고 아직도 풀이 그다지 많지가 않다.
최영장군과 비록 정적 관계였던 이성계도 그를 죽였지만 그의 죽음을 애
석 하게 생각하고 새 왕조를 새운 6년후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최영장군의 넋을 위로 하였다.
고려말의 충신으로 알려진 최영장군은 1316년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경남 창원입니다. 최영의 5대조 할아버지
인 최유청(1095 - 1174)이 수사공. 집현전.대학사 판예부사로 치
사 할만큼 명문가의 자손이 었습니다.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면서 조야의 신망을 얻은 최영장
군은 벼슬이 사문인.대호군. 서북면 병마부사. 등을 거쳐 1388년
요동정벌을 단행하면서 팔도 도통사에 이르게 됩니다.
최영과 함께 고려말을 풍미했던 명장 이방실.안우. 정세운. 김득
배 등이 김용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자. 김용의 음모를 밝혀내
어 김용을 처단 하기도 합니다.
신진 세력인 이성계와도 연대하여 고려말 내우외환으로부터 고려
를 지키는 간성으로 나라사람으로 추앙을 받았습니다.그러나 요동
정벌에서 이성계와의 의견대립으로 끝내 참형을 당하게 됩니다.
명문가의 후손이었지만 성품이 청렴결백하여 생활이 검소 하였고
인성이 강직하였다고 합니다.
최영장군은 고려의 제 32대 황제인 우황제의 장인이기도 합니다.
'☆ 指導者. 大望'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암행어사 박문수 (0) | 2011.09.20 |
---|---|
석 가 모니 부처님. (0) | 2011.09.11 |
대문호 톨스토이 (0) | 2011.09.05 |
미국의 16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0) | 2011.09.02 |
나폴레옹 황제 (0) | 2011.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