暗 行 御 史 朴 文 秀
지금의 군수격인 사또의 횡포와 착취가 전국적으로 횡행하던
조선후기 백성들은 재산을 빼앗기고 매를 맞아도 억울함을 하
소연할 길이 없었다. 그때 허름한 행색의 청년이 나타나 "암행
어사출두" 를 외치니. 수십명의 포졸이 육모방망이를 휘두르
며 나타나 부정한 사또를 포박하고 청년은 늠름한 자태로 사또
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날부터 관가의 곳간이 열리며 주린배를 채울수 있었으니 억
울한 백성들은 어사(御史) 박문수(朴文秀)의 출두를 기다렸다
탐관오리를 징계하고 원한을 풀어주는 백성들의 해결사
임금의 지방 관리들의 행동과 백성들의 생활을 알아보기 위해
몰래 파견하는 관리인 암행어사(暗行御史)는 조선시대에만 존
재한 특별한 직책이 었다.
그렇지만 임금의 명령이 사전에 새 나가는것을 막기위해 임명
과 동시에 한양 (지금의 서울) 을 출발해 도성을 벗어날때까지.
임무내용도. 가는지역도 알수 없고 신변 노출을 막기위해 초라
한 옷 차림으로 하루 80-90리 길을 걸어야 하는 암행어사는 쉬
운 임무가 아니었다.
더구나 지방관의 비리를 척결하는 암행어사의 활약을 막기위해
임무수행중에 독살당하는 일도 벌어지니 임금은 정직하고 기개
있는 선비중에서 암행어사를 뽑았는데 1509년 중종이 처음파견
한 이후 400년 가까이 활약한 수많은 암행어사중 으뜸으로 꼽히
는 이는 박문수다.
암행어사의 대명사.
숙종 17년인 1691년 태어난 박문수는 1723년 32살의 나이에 문과
에 급제해 역사의 기록을 담당하는 사관 (史官)으로 벼슬길에 나
섰다. 1년뒤 정오품(正五品)관직인 병조정랑(兵曺正郞)에 올랐으
나 당파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삭직(削職) 관직박탈 (벼슬에서물
러나는것) 을 당했다.
전설이된 박문수.
사실 박문수는 암행어사 외에도 경상도 관찰사. 병조판서.호조판서
우참찬등. 다양한 관직에 올랐다. 또 그가 어사로 파견된 이력은
1727년 영남안집어사 (嶺南安集御史). 1731년 영남감진어사(嶺南
監眞御史). 1741년 북도진흘사. 1750년 관동영남균세사 등.4차례에
불과하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들의 고통에 귀를 열고 부조리한 현실을 해결하
기 위해 조정대신들과 거침없이 맞섰던 박문수를 최고의 어사라 칭
송하며 그의 활약상을 그린 고전 소설 어사박문수전을 비롯한 숱한
설화를 만들어 냈다.
1756년 4월24일 세상을 떠난 박문수 그의 이야기가 지금도 회자되
는 것은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는 따뜻한 관리의 참 모습을 보
여 줬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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