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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指導者. 大望

암행어사 박문수


暗 行 御 史   朴 文 秀

 

 

 

 

지금의  군수격인 사또의  횡포와 착취가 전국적으로 횡행하던

조선후기  백성들은 재산을 빼앗기고 매를 맞아도 억울함을 하

소연할  길이 없었다. 그때 허름한 행색의 청년이 나타나 "암행

어사출두"  를 외치니. 수십명의  포졸이 육모방망이를 휘두르

며 나타나 부정한 사또를 포박하고 청년은 늠름한 자태로 사또

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날부터 관가의 곳간이 열리며 주린배를 채울수 있었으니 억

울한  백성들은 어사(御史) 박문수(朴文秀)의 출두를 기다렸다

 

탐관오리를 징계하고 원한을 풀어주는 백성들의 해결사

 

임금의 지방 관리들의 행동과 백성들의 생활을 알아보기 위해

몰래 파견하는 관리인 암행어사(暗行御史)는 조선시대에만 존

재한 특별한 직책이 었다.

 

그렇지만 임금의 명령이 사전에 새 나가는것을 막기위해 임명

 과 동시에 한양 (지금의 서울) 을 출발해 도성을 벗어날때까지.

임무내용도. 가는지역도 알수 없고 신변 노출을 막기위해 초라

한 옷 차림으로 하루 80-90리 길을 걸어야 하는 암행어사는 쉬

운  임무가 아니었다.

 

더구나 지방관의 비리를 척결하는 암행어사의 활약을 막기위해

임무수행중에 독살당하는 일도 벌어지니 임금은 정직하고 기개

있는 선비중에서 암행어사를 뽑았는데 1509년 중종이 처음파견

한 이후 400년 가까이 활약한 수많은 암행어사중 으뜸으로 꼽히

는 이는 박문수다.

 

암행어사의 대명사.

 

숙종 17년인 1691년 태어난 박문수는 1723년 32살의 나이에 문과

에  급제해 역사의 기록을 담당하는 사관 (史官)으로  벼슬길에 나

섰다.  1년뒤 정오품(正五品)관직인 병조정랑(兵曺正郞)에 올랐으

나 당파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삭직(削職) 관직박탈 (벼슬에서물

러나는것) 을 당했다.

 

 

 

 

전설이된 박문수.

 

사실 박문수는 암행어사 외에도 경상도 관찰사. 병조판서.호조판서

우참찬등.  다양한  관직에  올랐다. 또  그가 어사로 파견된 이력은

1727년  영남안집어사 (嶺南安集御史). 1731년  영남감진어사(嶺南

監眞御史). 1741년 북도진흘사. 1750년 관동영남균세사 등.4차례에

불과하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들의 고통에 귀를 열고 부조리한 현실을 해결하

기 위해 조정대신들과 거침없이 맞섰던 박문수를 최고의 어사라 칭

송하며 그의 활약상을 그린 고전 소설 어사박문수전을 비롯한 숱한

설화를 만들어 냈다.

 

1756년 4월24일 세상을 떠난 박문수 그의 이야기가 지금도 회자되

는  것은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는 따뜻한 관리의 참 모습을 보

여 줬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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