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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 과 사 전

삼황 오제 (三皇 五 帝)

 

三皇五帝 ,

 

세 명의 임금과 다섯 명의 제왕. 중국 전설 속의 상고시대의 제왕으로, 이상적인 제왕의 상을 말한다.

 

출전

황(皇)은 ‘크다(大)’ 또는 ‘아름답다(美)’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제(帝)는 원래 하느님(上帝)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두 글자 모두 후에 인주(人主)나 인군(人君)을 호칭하는 말이 되었다.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 왕조 이전에 출현한 전설상의 제왕을 말하는데, 엄밀히 따지자면 한 국가의 제왕이라기보다는 원시 부락의 수령, 혹은 부락 연맹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삼황오제에 대한 설은 5∼6가지가 있으며, 거론된 인물은 삼황이 7명 오제가 10명에 달하는데, 현재 통용되는 설에서 말하는 삼황은 수인(燧人) · 복희(伏羲) · 신농(神農)이고(《상서대전(尙書大傳)》), 오제는 황제(黃帝) · 전욱(顓頊) · 곡(嚳) · 요(堯) · 순(舜)(《대대례기(大戴禮記)》)이다. 이 밖에도 삼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1. 복희 · 여왜(女媧) · 신농(《풍속통의(風俗通儀)》)
2. 복희 · 축융(祝融) · 신농(《풍속통의》)
3. 복희 · 신농 · 공공(共工)(《풍속통의》)
4. 복희 · 신농 · 황제(《고미서(古微書)》)

오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1. 포희(庖犧) · 신농 · 황제 · 요 · 순(《전국책(戰國策)》)
2. 태호(太昊) · 염제(炎帝) · 황제 · 소호(少昊) · 전욱(《여씨춘추(呂氏春秋)》)
3. 황제 · 소호 · 전욱 · 곡 · 요(《자치통감 외기(資治通鑒外紀)》)
4. 소호 · 전욱 · 곡 · 요 · 순(《상서 서(尙書序)》)

참고로, 오천제(五天帝)가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황제(黃帝, 함추뉴(含樞紐), 중앙) · 청제(靑帝, 영위앙(靈威仰), 동방) · 적제(赤帝, 적표노(赤熛怒), 남방) · 백제(白帝, 백초거(白招拒), 서방) · 흑제(黑帝, 즙선기(汁先紀) 혹은 섭광기(葉光紀), 북방)(《주례(周禮) 〈천관(天官)〉》의 가공언(賈公彦) 소(疏))

신화와 전설의 시대를 거친 후 약 170만 년 전부터 중국에서는 인류의 활동이 있었는데, 그 지점은 현재의 운남성(雲南省) 원모현(元謀縣)이라고 한다. 그리고 약 70만 년 전에서 20만 년 전 사이에 한 무리의 원시인들이 북경(北京) 서남쪽의 주구점(周口店) 일대에서 살았다. 그들은 돌을 깨서 조악한 석기를 만들었으며 불씨를 보존하기도 했는데, 이들이 바로 북경원인(北京原人)이다. 이들이 활동했던 시대와의 상관관계를 알 수는 없지만, 대략 이 무렵쯤 중국은 ‘삼황’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물론 이 시대 역시 역사시대는 아니지만, 중국에서 문명이 시작된 시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삼황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지만, 대체로 수인씨, 복희씨, 신농씨를 삼황으로 보고 있다.

비록 삼황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유소씨(有巢氏)도 문명 발전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뜻글자인 중국의 문자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듯이, 유소씨는 나무를 엮어 집을 만든(構木爲巢) 인물이다. 유소씨가 집을 개발한 덕분에 동굴에서 생활을 하던 원시인류는 비로소 움집 형태나마 자신의 안전을 어느 정도 지켜 줄 수 있고, 독립된 가정생활을 보장해 주는 집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삼황의 첫 번째 인물은 나무를 비벼 불을 만든(鑽木取火) 수인씨다. 수인씨 덕분에 이제 인류는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고, 난방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안전을 더욱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수인씨는 중국의 프로메테우스라 할 수 있다.

삼황의 두 번째 인물은 사람들에게 고기잡이와 수렵을 가르친(敎民漁畋) 복희씨다. 복희씨 덕분에 사람들은 자연의 처분만을 기다리지 않고 주동적으로 나서서 짐승을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아 식생활을 개선할 수 있게 되었다. 복희씨는 그물도 발명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강’이란 단어는 여기서 나온 말이다. 기(紀)와 강(綱)은 각각 그물의 아래와 위의 코를 꿴 줄을 말한다. 이 기강이 흐트러지면 그물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기강이 무너지면 그 가정과 사회와 단체, 더 나아가서 국가가 위태로워진다. 복희씨는 또한 팔괘(八卦)를 창제하여 문자 발생의 기초를 닦았다. 이전에는 결승문자(結繩文字)를 사용했는데, 인류의 표현 대상이 점차 복잡해짐에 따라 복희씨가 팔괘를 창제하여 표현의 범위를 확대시킨 것이다.

삼황의 마지막은 백성들에게 경작을 가르친(敎民耕作) 신농씨다. 이제 인류는 나무 열매와 짐승을 찾아다니던 불안정한 생활에서 벗어나 일정한 땅에서 경작을 하는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농경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신농씨는 백초의 맛을 보아 약초를 선별하여 인류의 건강과 보건 생활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 떠돌이 동굴 생활을 하던 인류가 집이 생기고, 불을 발견하고, 수렵과 물고기 잡이 기술이 생기고, 거기다가 농경의 시작으로 정착을 하게 되면서 문명 발달의 기초가 확립된 셈이다. 바로 이 기초 위에 비교적 구체적인 문명을 세운 것이 바로 오제 시대이다. 오제에 대해서도 이설이 있지만 대체로 황제, 전욱, 곡, 요, 순을 오제로 보고 있다.

4천∼5천 년 전, 많은 부락들이 황하(黃河) 유역과 장강(長江) 유역에 나타났다. 그중 유명했던 부락의 수령이 바로 황제였다. 황제 때부터 중국의 문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황제는 한 일이 정말 많았다. 수레와 배를 발명했고, 활과 화살, 지남침 등 문명의 이기를 발명했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문자를 발명했다. 창힐(倉頡)이 짐승의 족적을 본떠 문자를 만듦으로써 결승문자와 팔괘를 거쳐 비로소 문자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의복을 발명했다. 나뭇잎과 짐승 가죽으로부터 시작하여 신농 시대에는 마직류 비슷한 옷감으로 몸에 걸치기만 했었는데, 황제 시대에 정식 의관이 만들어진 것이다.

간지(干支)를 정해 역법(曆法)을 만들었다. 천문에 통달한 대요(大撓)라는 사람이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를 정립했다. 역법의 발명은 농업 발달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악률(樂律)을 제정했다. 영윤(伶倫)이란 사람이 대나무를 자른 12개의 서로 다른 죽간에 구멍을 뚫어 12음계를 만들어 냈는데, 이를 율려(律呂)라고 한다. 음악의 발명은 제천의식(祭天儀式)과 깊은 관계가 있다. 농업은 자연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수확, 수렵, 경축 등 여러 행사에 음악이 사용되며, 중국의 전통 사상인 유가에서 백성들의 교화에 음악은 필수가 되고 있다.(그 대표적인 것이 공자(孔子)가 편찬한 《시경(詩經)》이다. 공자는 당시 민간에 유행하던 3천여 곡의 음악 중에서 건전한 음악 305수를 골라 《시경》을 편찬하였다.)

의료 방법을 발명하였다. 기백(岐伯)이란 사람이 약초를 가지고 치료를 하며 황제와 일문일답하여 적어 놓은 중국 최초의 의서가 《황제내경(黃帝內經)》이다. 수학에서는 예수(隸首)라는 사람이 도량형을 제정하였다.

황제의 뒤를 이은 걸출한 부락 연맹의 수령으로 요 · 순 · 우가 있었다. 요는 공자가 추구했던 이상형의 정치를 행한 사람이다. 백성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을 정도로 태평성세를 누렸다. 요는 띠집에서 조악한 음식을 먹으며 일반 백성들과 동고동락하였다. 천하에 한 사람이라도 배고픔이나 추위를 겪거나 범죄로 피해를 입는 이가 있으면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으며, 농업을 중시했다. 90세(재위 70년)에 순에게 양위했다. 요에게는 아들이 있었지만 ‘내가 아들에게 양위하면 한 사람은 즐거워하지만 많은 사람이 슬퍼한다. 아들에게 양위하지 않으면 한 사람은 슬퍼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한다.’고 생각하여 현자인 순에게 양위한 것이다.

순은 효자였다. 부친은 맹인이었고, 모친은 계모로 여러 차례 순을 죽이려 했지만, 순은 끝까지 효성을 다했다. 요가 효자인 순에게 양위한 사실은 충효 사상을 국가의 통치 이념 중 하나로 삼는다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순 역시 요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있었지만, ‘내가 아들에게 양위하면 한 사람은 즐거워하지만 많은 사람이 슬퍼한다. 아들에게 양위하지 않으면 한 사람은 슬퍼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한다.’고 생각하여 우에게 양위했다. 요 · 순 모두 친자에게 양위하지 않고 현자를 골라 양위한 것이다.

진(秦)나라 왕 영정(嬴政, 후의 진시황)은 여섯 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후 황제(皇帝), 짐(朕), 궁(宮) 등 황실 전용 언어를 정착시켜 왕권을 강화했는데, 황제라는 명칭은 바로 ‘삼황오제’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자신을 진나라의 처음 황제라는 뜻에서 시황제(始皇帝)라 칭하고, 자신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는 자손들을 이세황제(二世皇帝), 삼세황제(三世皇帝) 등으로 부르도록 했다.

 

 

삼황오제(三皇五帝)

 

삼황오제(중국어: 三皇五帝, 병음: sānhuáng wǔdì)는 중국의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제왕들로 세 명의 황(皇)과 다섯 명의 제(帝)를 말한다. 이들 여덟 명의 제왕은 중국 문명의 시조로 추앙되며 근대 이전의 중국에서 신화가 아닌 역사로서 추앙되었다. 현대의 역사학계에서는 삼황오제 신화가 후대에 창조되고 부풀려진 신화이며,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부터 중국은 중화민족주의에 입각하여 국가 차원의 개입을 통해 삼황오제를 실존 인물로 격상하려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학계의 우려를 낳고 있다.

 

 

삼황오제 신화의 기본 틀이 되는 상고대 시조 설화의 원형은 상나라 무렵부터 이어져 왔다. 그리고 춘추 전국 시대에 제자백가가 각종 사상을 주창하고 제후들에게 유세하면서 삼황오제 신화가 창조되어 틀을 갖추어 나갔다. 오제 신화의 경우 음양오행설이 유행한 이후에 5명의 제왕이 신화로서 정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후대에 재창조된 신화이기 때문에 삼황과 오제의 구성원은 제자백가의 주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춘추 전국 시대에서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삼황오제 신화는 계속 재창조되었다.

 

삼황오제는 근대 이전의 중국에서 역사적 사실로 오랜 기간 추앙되었다. 특히 황제와 요, 순은 중국의 이상적인 성천자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청나라 말기 캉유웨이, 구제강 등이 주도한 의고학파(疑古學派)의 연구를 통해 삼황오제 기록의 역사성이 부정되고 종교적 영향으로 꾸며진 신화임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중국의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강화되면서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중국 역사의 기원을 상향 조정하고 신화 속 제왕들의 연대를 비정하는 등 삼황오제를 비롯한 신화 속의 인물들을 실존 인물이라 주장하는 각종 공정을 진행하고 있어 학계의 우려를 사고 있다.

 

삼황(三皇)​

 

중국 역사상 삼황오제에 관한 설은 전국 시기에 이르러서야 나타나기 시작한다. 먼저 삼황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이 7종의 설이 있다.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 《사기(史記)》 〈보삼황본기(補三皇本紀)〉에 인용된 《하도(河圖)》, 《삼오력(三五曆)》

천황, 지황, 태황(泰皇) : 《사기》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복희(伏羲), 여와(女媧), 신농(神農) : 《풍속통의(風俗通義)》 〈황패편(皇覇篇)〉

복희, 신농, 공공(共工) : 《통감외기(通鑒外紀)》

복희, 신농, 축융(祝融) : 《백호통(白虎通)》

수인(燧人), 복희, 신농 : 《풍속통의》 〈황패편〉에 인용된 《예위(禮緯)》 〈함문가(含文嘉)〉

복희, 신농, 황제(黃帝) : 《십팔사략》, 《제왕세기(帝王世紀)》와 손씨주(孫氏注) 《세본(世本)》

 

십팔사략에 나온 삼황​

 

아래는 십팔사략에 나온 삼황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에서의 삼황은 태호 복희, 염제 신농, 황제 헌원을 말한다.

 

삼황은 맨 처음 세 명의 왕도 아니고, 연속적인 세 명의 왕이 아니다. 그들은 각각 인류 문명에 필요한 획기적인 발명을 통해 후세에 큰 모범이 되었기에 “삼황”(三皇)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삼황의 첫 째인 복희는 태호(太昊 : 큰 하늘)라 불렸으며, 뱀 몸에 사람 머리를 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사냥법과 불을 활용하는 법을 가르쳤다.

 

복희의 뒤를 이어 몇 명의 왕이 자리를 잇다가, 두 번째 삼황인 신농의 시대가 왔다. 염제(炎帝 : 불꽃 임금)라고도 불린 신농은 사람 몸에 소의 머리를 가졌다. 그는 태양신이자 농업신으로 농경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또한, 태양이 높게 떠 있는 시간에는 사람들에게 상업을 가르쳤다고 한다.

 

염제 신농의 자리를 이은 것이 바로 황제 헌원(軒轅)이다. 헌원은 사람들에게 집짓는 법과 옷 짜는 법을 가르쳤으며, 수레를 발명했다. 글자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해 천문과 역산을 시작하고, 의료술을 시작한 것도 황제였다. 어느 정도 사람들의 삶이 안정되자 황제는 태산(泰山)에 행차하여 천지 사방의 신을 모두 불러 모았다. 황제는 큰 코끼리가 끄는 보물로 된 수레를 탔으며, 황제의 위세를 본 신들은 그의 위력에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천지 사방의 신 중, 황제에 따르지 않는 무리는 치우(蚩尤)를 따라 반란을 꾀했다. 치우는 눈이 넷, 손이 여섯이었으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있었다. 쇠와 돌을 즐겨 먹는 신으로 자신의 72명의 형제와 함께 싸움에 매우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황제는 치우의 모반을 알자마자 군사를 모아 판천과 탁록에서 치우를 격파하였다. 치우는 부하인 풍백, 우사와 함께 저항했으나 결국 황제에게 항복했다.

 

치우의 난을 평정한 황제는 이후 별 탈 없이 지내다가 백 살 되던 때,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황제가 하늘로 돌아가기를 간청했다. 많은 사람이 황제의 치세가 계속되기를 기원했지만, 황제는 중신들과 함께 용을 타고 승천하였고, 이후 황제의 다섯 자손(“오제”)이 세상을 다스렸다.

 

오제(五帝)​

 

오제에 대해서는 일치하는 설이 없으며 주로 다섯가지로 요약된다.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당요(唐堯), 우순(虞舜) : 《황왕대기(皇王大紀)》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당요(唐堯), 우순(虞舜) : 《세본(世本)》, 《대대례(大戴禮)》, 《사기》 〈오제본기〉

태고(太皋: 복희), 염제(炎帝: 신농), 황제(黃帝), 소고(少皋), 전욱(顓頊) : 《예기(禮記)》 〈월령(月令)〉

황제(黃帝), 소고(少皋), 제곡(帝嚳), 제지(帝摯), 제요(帝堯) : 《도장(道藏)》 〈동신부(同紳部)·보록류(譜錄類)·곤원성기(混元聖記)〉에 인용된 양무제(梁武帝)의 말

소호(少昊), 전욱(顓頊), 고신(高辛), 당요(唐堯), 우순(虞舜) : 《상서서(尙書序)》, 《제왕세기》, 《십팔사략》

 

십팔사략에 나온 오제​

 

십팔사략에서 오제는 황제의 뒤를 이은 다섯 자손을 뜻하며, 소호 금천, 전욱 고양, 제곡 고신, 제요 도당, 제순 유우의 다섯 명이다. 뒤의 두 명을 따로 떼어 '성군'을 칭송할 때 관용적으로 쓰이는 요순임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호 금천(少昊 金天)은 황제의 아들로 황제가 승천한 후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봉황이 날아들어 소호의 정치를 도왔다.

 

소호의 뒤를 이은 것은 전욱 고양(顓頊 高陽)으로, 전욱은 소호의 형의 아들이었다. 아직 반고의 천지 창조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하늘과 땅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았다. 전욱은 엄격한 법을 세워 하늘과 땅의 구별을 확실히 하고, 인간 세상에서도 주종관계, 남녀관계 등을 확실히 세웠다.

 

전욱의 뒤를 이은 것은 소호의 아들인 제곡 고신(帝嚳 高辛)이었다. 그는 음악의 신으로, 각종 악기와 음악을 만들어 백성들을 즐겁게 하였다.

 

삼황오제의 동이설

 

삼황오제는 중국 신화 속의 대표적인 인물이지만, 이들을 동이(東夷)나 한민족으로 간주하는 주장이 있다. 삼황오제가 동이였다는 중국의 사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동이라는 존재를 모두 한민족으로 보는 역사관이 존재한다. 또한 20세기 이후에 쓰여진 《환단고기》와 같은 일부 서적에는 삼황오제 가운데 일부 혹은 전부를 동이나 한민족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진(秦)나라 이전의 동이와 한(漢)나라 이후의 동이는 같은 존재가 아니며, 한민족이 속해 있는 동이는 한나라 이후의 동이이기 때문에 진나라 이전의 동이에 해당하는 삼황오제의 동이 여부와 한민족은 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환단고기》와 같은 서적은 위서로 판별되어 역사적 가치가 없어 삼황오제 동이설의 근거가 될 수 없다.

 

한편 《삼국사기》를 비롯한 일부 기록에서 신라 및 가야의 왕족이 소호 금천씨를 선조로 기록한 것이 나타나며, 고구려 왕족 역시 제곡 고신씨 또는 전욱 고양씨를 조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서술은 왕족의 혈통을 신성시하기 위해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 또는 유명한 위인들을 일부 유사성을 근거로 하여 시조로 삼는 것으로 해석되므로 사실로 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