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박정희, YS, DJ, 노무현을 톺아보고 남은것 박도 입력 2020.10.05. 18:06 댓글 212개
(톺아보고= 샅샅이 흝어보고 살펴보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76)] 연재를 마치면서
[박도 기자]
▲ 홍천, 6.25전쟁 중 전방부대를 시찰 하는 이승만 대통령(1951. 8. 22.). |
ⓒ NARA |
내가 본 역대 대통령 이야기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어떤 매체에 연재할 때는 두 마음이 공존한다. 하나는 귀한 면을 일정한 기간 얻고 그에 따른 원고료가 들어오는 기쁨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때부터 연재를 마칠 때까지 글을 쓰는 괴로움이다. 그래서 연재에는 고락(苦樂)이 따르기 마련이다.
지난 해 연말 [박도 기자의 NARA 앨범]을 끝내면서 다음 연재는 무엇으로 할까 고민했다. 그때 문득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나는 1945년부터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초대 이승만 대통령에서부터 제19대 문재인 정부까지 열두 분의 대통령과 내각책임제하의 장면 총리를 멀리서 때로는 가까이서 바라봤다. 몇 분과는 악수까지 나눈 인연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저런 얘기를 기사로 쓰고 싶었다.
2020년 1월 7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1~3대 이승만 대통령 제1회를 출고한 뒤, 2020년 2월 3일에는 제4대 윤보선 대통령, 이어서 2월 19일부터 내각책임제하 장면 국무총리 편을 연재했다. 2020년 3월 2일부터는 제5~9대 박정희 대통령 편을 시작하여 모두 12회로 마무리했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동향으로 박 대통령은 구미초등학교 대선배다. 하지만 글쓰는 이로 그런 지연에 얽매지 않으려고 고심했다. 이어서 4월 13일부터 최규하 대통령 편을 연재하는데 공교롭게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원주 시내 이웃 마을에서 태어났기에 친밀감이 갔다. 하지만 유족 측에서는 나의 필치가 짰다고 불만할 것이다.
2020년 4월 27일부터는 전두환 대통령 편을 연재한 바, 생존인물이라 부담이 갔다. 그래서 나의 오랜 답사 경험을 살린 여행기로 쓰고자 전두환 대통령부터 노무현 대통령까지는 생가 답사에 나섰다.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은 육사 동기인데다가 같은 경북 대구 출신이고, 생가도 가까워 같은 날 한꺼번에 답사할 수 있었다.
▲ 내각책임제하 장면 총리(주미 대사 시절) |
ⓒ nara |
연재 뒷 이야기
그 길로 제14대 김영삼 대통령의 생가인 경남 거제도 대계마을까지 갔다. 나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과는 두 번 악수를 나눈 적이 있었다. 김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니까 그분의 호 '거산'(巨山)과 달리 대단히 왜소한 체구였다. 언젠가 책에서 본 바, 큰 인물은 멀리서 보는 게 좋다는 말이 실감났다.
7월 16일부터는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편이었다. 남도 끝 목포로 가서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하의도로 갔다. 김대중 대통령은 나의 선친이 좋아했던 인물이다. 그 영향 탓인지 나와도 인연이 이어져 그분 막내아들을 2년 동안 가르쳤다. 그런 탓으로 생전에 두 번 만났다. 이희호 여사는 청와대 시절부터 돌아가시던 해까지 20여 년 동안 한 해도 빠트리지 않고 해마다 연말이면 크리스마스카드를 손수 써서 보내주셨다.
2020년 8월 27일부터는 제16대 노무현 편을 연재했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시절 금강캠프장 염동연 의원이 고3 때 짝이라 그 친구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애초부터 현직 문재인 대통령은 쓰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러다 보니 제17대 이명박 대통령과 제18대 박근혜 대통령이 막바지로 남았는데, 솔직히 그 두 분은 왠지 쓰고 싶지 않았다. 괜히 연재를 시작했다는 후회감도 들었다.
그 이유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그래서 두 분 모두 최단 2회 연재로 마무리했다. 그리하여 2020년 9월 24일까지, 총 75회로 열한 분의 대통령과 한 분의 총리 등 열두 분의 이야기를 모두 들려드렸다.
▲ 5~9대 박정희 대통령 |
ⓒ 자료사진 |
초석을 놓지 못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
1~3대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 대통령으로 이 나라 민주헌정사에 초석을 놓지 못했다. 무엇보다 당신의 임기 연장을 위해 헌법을 고친 점은 큰 오점이요, 특히 반민 특위 해산으로 민족정기를 크게 훼손한 점은 큰 과오다.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를 막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와 정책 대결을 하지 않고, 색깔론에 함몰해 마침내 정권을 되찾지 못한 우(愚)를 범했다. 우리나라 최초 내각책임제하 국무총리 장면은 멋진 신사로 그 시대에 맞지 않은 정치인이었다.
그분이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지켰다면 5.16 쿠데타는 성공치 못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당시 칼멘 수녀원에 숨어있던 장 총리는 미국이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는 것을 알고 체념한 뒤 순순히 정권을 이양한 것으로 보인다.
제5~9대 박정희 대통령은 이 나라에 가난을 물리치겠다는 불같은 집념으로 재임 중 산업국가로 탈바꿈 시킨 점과 산을 푸르게 한 점은 큰 업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무리한 장기집권으로 부인도, 본인도 비명에 갔다. 제10대 최규하 대통령은 한밤중에 굴러온 대권을 그저 주운 벙거지를 쓴 허수아비였다. 체구는 가장 큰 분이 역대 대통령 가운데 통은 제일 작은 듯하다.
제11~12대 전두환 대통령은 출발부터 나빴다. 참 무서웠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교사였는데 심지어 학급정화위원회까지 만들어 정화일지를 쓰게 했던, 참으로 웃기던 시절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그 시절 아버지의 투옥으로 집안이 풍비박산됐다. 그 후유증은 아직까지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한 가지 점수를 주고 싶은 것은 그래도 자기 분수를 알고 경제 분야는 전문가에게 맡긴 점이라 하겠다.
▲ 제14대 김영삼 대통령 |
ⓒ 자료사진 |
노태우, 대통령의 권위를 먹칠하다
2020년 5월 30일부터 제13대 노태우 대통령을 연재했다. 그는 6.29선언이라는 '신의 한 수'와 같은 '속이구' 승부수로 YS와 DJ의 약점을 파고들어 어부지리로 대통령 자리를 꿰찼다. 그때 그가 내세운 '보통사람'이라는 말은 유권자들을 상당히 현혹시켰다. 하지만 그는 보통사람인 척했을 뿐, 의뭉스런 정치군인이었다. 다만 그의 재임 때 북방정책만은 업적이라 하겠다. 말년에 숨겨둔 비자금이 들통나서 대한민국 대통령의 권위에 스스로 먹칠을 했다.
제14대 김영삼 대통령을 취재하고자 거제도 대계마을로 갔다. 그는 멸치 어장주 김홍조 옹의 외아들로 경남고,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를 나온 귀공자로 정계에 투신해 잔뼈가 굵어진 행운아였다. 그는 DJ와는 영원한 맞수요, 동지로 함께 정치 역정을 헤쳐 왔다. 차라리 대통령이 되지 않고 민주투사로 남았더라면 '영원한 민주투사 YS'로 역사에 길이 추앙받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
3당 합당 등으로 대권의 권좌에 오른 뒤 처음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그의 지지율이 치솟았다. 하지만 국가경영의 통치술은 평소 내공 부족으로 마침내 IMF 구제금융사태까지 몰고 갔다. 그는 젊은날 투쟁에만 몰두했지 집권 이후의 국가경영에 대비한 통치술 공부는 게을리 한 듯했다. 게다가 하늘조차도 그를 돕지 않았다.
남북정상회담 16일을 앞둔 시점에서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무산이 되었고, 땅과 하늘, 바다에서 연이은 대형 사고가 터졌다. 하지만 공직자 재산 등록, 군의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전두환·노태우 구속 등은 큰 업적이라 하겠다. 특히 그가 하나회 척결로 정치군인들을 정치판에서 몰아냈기에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들어설 수 있었을 것이다.
2020년 7월 12일부터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편을 연재했다. 이 연재를 위해 7월 3, 4일 전남 신안군 하의도 생가를 취재한 바, 벽도의 섬 소년이 대통령이 된 것은 '낙도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김대중처럼 우리나라 정치인 가운데 풍상을 겪은 이도 드물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사형수에서 대통령이 됐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동초' '4전5기' 등의 수식어가 뒤따른다.
그는 절망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교도소를 오히려 내공을 키우는 학교로 삼아 독서로 공부한 점은 역경에 처한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교본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분단 이후 최초로 이룬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로 이룬 '6.15 선언'은 길이 역사에 남을 금자탑이다. 다만 정계 번복 발언은 정치인의 말에 대한 신뢰성을 잃게 한 점은 옥의 티로 아쉽다.
2020년 8월 27일부터는 우리 정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노무현 편이었다. 변방 김해 봉하마을의 고교 출신 변호사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것은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분은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뛰어난 전술가였다. 하지만 대통령이 되고 난 이후 당신이 바라던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전략은 부족했다. 퇴임 후 고향마을 뒷산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일은 우리 헌정사에 한 오점으로 우리 모두를 아프게 했다.
▲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
ⓒ 자료사진 |
'통일 대통령'을 기다리자
제17대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했더라면 본인도, 나라도 좋았을 것이다. 제18대 박근혜 대통령은 조용히 아버지 추모 사업을 하면서 소외받는 계층의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사회사업으로 여생을 보냈더라면 본인과 아버지의 명예도 지키고, 유신 공주 및 퍼스트레이디의 이미지를 끝내 유지했을 것이다.
2009년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일이다. 그날 나는 안 의사의 마지막 행장을 쫓고자 속초항에서 극동 러시아 연해주 자루비노 항으로 가는 밤배를 탔다. 그날 저녁을 먹은 뒤 선상 스낵코너에서 차를 마시면서 중국과 러시아 동포 승객들과 환담을 나눈 적이 있었다. 밤이 깊어 대화가 무르익자 훈춘에 산다는 한 보따리상인 동포가 나에게 뜻밖에 질문을 했다.
"제가 연변에서 학교 다닐 때 배운 바 남조선은 아직도 미군이 주둔하는, 미제 식민지라는데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는 답하기 난감한 질문이라 그에게 반문했다.
"남쪽에 와서 보니까 그렇게 보였습니까?"
"그렇게 보이지는 않더만요."
"그게 답입니다."
나는 그렇게 어물쩍 넘긴 적이 있었다. 역대 대통령 열한 분을 비롯한 현직 문재인 대통령까지 재임 중 아마도 미국의 간섭과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은 과거 한때 청와대까지 도청을 했던 나라다. 대통령으로서 고충은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사실 분단된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최우선으로 통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두 말씀으로 갈음한다.
그 하나는 "이 나라 시민들이 통일 대통령을 키우자"는 말이요, 그 둘은 "우리는 계속 희망을 가지고 이 겨레를 구할 '초인', 곧 위대한 통일 대통령을 기다리자"는 말이다.
이 연재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그동안 열독해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여러분의 성원이 있고, 내 건강이 허용하는 한 다른 주제의 얘기를 계속 들려드리겠다고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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