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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指導者. 大望

한명회 (자준.韓明澮)

한명회 (자준, 韓明澮)

 

한명회

자준, 韓明澮

 

  1. 초라한 출발, 드높은 꿈

  2. 계유정난으로 날개를 달다

  3.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분쇄하다

  4. 국가 경영 능력을 발휘하다

  5. 위기는 극복하는 것이다

  6. 영광의 나날들

  7. 면리(面里) 제도를 만들다

  8. 갈매기와 노닐고자 했지만

  9. 책사인가, 참모인가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2,300여 건이나 등장하는 인물, 세조 대부터 성종 대까지 3대에 걸쳐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인물, 그가 바로 수양대군의 장자방으로서 계유정난

 

불안했던 단종단종복위운동

그와 같은 공적을 바탕으로 한명회는 세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며,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내 권신과 외척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세조가 죽은 뒤에는 신숙주

한명회는 국가 경영에도 수완을 발휘하여 북방을 안정시켰고, 그가 만든 면리(面里) 제도

 

초라한 출발, 드높은 꿈

한명회(韓明澮)는 개국 당시 명나라에 파견되어 ‘조선(朝鮮)’이란 국호를 확정짓고 돌아온 개국공신 한상질의 손자이다. 자는 자준(子濬), 본관은 청주, 호는 압구정(狎鷗亭)·압구(狎鷗)·사우당(四友堂)이다.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출신으로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된 한기(韓起), 어머니는 예문관대제학

이적(李逖)의 딸인 여주 이씨이다.

 

1415년(태종 15년) 10월 25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는데 칠삭둥이인데다 병약했으므로 곧 죽을 줄 알고 버려두었는데, 그를 가엾게 여긴 늙은 여종이 거두어 키웠다. 태어날 때부터 배 위에 검은색 점이 몇 개 있었으므로 세간에 북두칠성의 정기를 품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이 비상하고 행동이 활달했으므로 종조부 한상덕이 장차 집안을 일으킬 인물이라 하여 집안에 들였고 종조부 한상환이 학문을 가르쳤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동생 한명진과 함께 불행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다행히 한상덕의 지원을 받아 강원도 자망산에 은거하고 있던 유학자 유방선의 문하에서 지기인 권람, 서거정 등과 함께 공부했다. 유방선은 권근 변계량의 제자로 일찍이 세종이 집현전 학사를 보내 자문을 구하기도 했던 유현(儒賢)이었다. 그러나 친구 권람은 문종 원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집현전 교리가 되었지만 그는 낙방을 거듭했다. 이에 주변에서 비웃는 이들이 많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고 마차에 술과 책을 싣고 천하를 주유하면서 비상의 그날을 기다렸다.

 

 

한명회는 그렇듯 느긋한 태도를 견지했지만 좀처럼 그 때는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38세 때인 1452년에 간신히 문음(門蔭)으로 경덕궁직(敬德宮直)을 얻었다. 경덕궁은 개성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잠저(潛邸)였다. 관리로서는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그는 고위직에 있던 친구 권람에게 이렇게 큰소리를 쳤다. “문장과 도덕은 네게 양보하겠지만 정사만은 양보할 수 없다.”

 

계유정난으로 날개를 달다

한명회가 관직에 나간 그해에 문종이 죽고 12세의 어린 단종이 보위에 올랐다. 당시 정권은 단종을 보좌하던 김종서황보인

 

그 동안 재야를 전전하며 정세를 헤아리던 한명회는 풍운아 수양대군의 야망을 한 눈에 꿰뚫어보고 친구 권람을 통하여 그를 만난 뒤 노골적으로 야심을 부추겼다. 그때부터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최측근 참모로서 왕권 탈취의 모든 단계를 진두지휘했다.

당시 수양대군의 세력은 안평대군

 

수양대군은 또 한명회의 조언에 따라 신숙주, 정인지, 정창손 등 유력한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했고, 김종서와 황보인의 경계심을 늦추기 위해 명나라 사신을 자청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조정에 안평대군을 지지하는 신료들이 많았으므로 거사를 망설이자 한명회가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1453년(단종 1년) 10월 10일, 결심을 굳힌 수양대군은 휘하 무사들을 이끌고 밤늦게 김종서의 집을 찾아가 김종서와 아들 김승규를 제거했다. 이어서 당시 경혜공주궁에 머물고 있던 단종에게 안평대군이 난을 일으켰다고 거짓 보고하여 환궁하게 한 다음, 경복궁을 장악하고 승지 최항과 환관 전균을 통해 어명으로 중신들을 대궐로 불러들였다.

 

이때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정적으로 지목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은 〈살생부(殺生簿)〉를 들고 그들의 생사를 관장했다. 쿠데타 모의 과정에서 그는 신하들의 성향과 능력, 세조에 대한 지지, 설득의 가능성 여부 등을 파악하여 살생부를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생사의 갈림길은 근정문 좌우에 있는 출입문이었다.

 

이때 친수양대군파로 분류된 정인지, 이계전, 이순지 등은 근정문 왼쪽 문으로 들어와 무사했지만 정적으로 분류된 황보인과 조극관, 이양 등은 근정문 오른쪽 문으로 들어왔다가 한명회의 신호에 따라 홍윤성과 함귀, 구치관의 철퇴를 맞고 목숨을 잃었다.

 

한명회는 이어서 입궐하지 않은 윤처공, 이명민, 조번, 원구, 김연 등의 집에 무사를 보내 일가를 몰살시켰고, 문종의 비석 제작을 감독하던 민신을 창으로 찔러 죽였으며, 안평대군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 마지막으로 그때까지 살아있던 김종서를 추적하여 죽임으로서 역사에 계유정난으로 이름 지어진 유혈 쿠데타를 마무리했다. 그날의 공적으로 한명회는 종8품 군기녹사(軍器錄事)를 거쳐 종4품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이 되었다. 그때부터 보잘 것 없는 궁지기의 초고속 출세 행진이 시작되었다.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분쇄하다

일거에 정적들을 도륙하고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영의정이 되어 조정을 주물렀다. 이윽고 한명회의 사주를 받은 공신들은 단종에게 연일 왕위를 내놓으라고 겁박했다. 그들의 서슬퍼런 공세를 견디지 못한 단종은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과거 세종으로부터 단종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성삼문

1456년(세조 2) 6월 세조가 창덕궁 광연루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송별연을 베풀 때 별운검으로 성승과 유응부가 결정되자 성삼문은 당일로 거사를 확정지었다. 이때 기이한 낌새를 눈치챈 한명회는 신숙주와 함께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세조를 설득하여 별운검을 폐지하고 연회에 세자를 불참하도록 함으로써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로 인해 거사 날짜가 연기되자 불안감을 느낀 김질이 장인 정창손을 통해 세조에게 고변함으로써 거사 계획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해 6월 2일, 경자(庚子)일, 실록에 선연히 박혀있는 두 글자가 뒤이을 참사를 예고하고 있다. ‘낮이 어두웠다.[晝晦]’

 

평소 아꼈던 집현전 학사들의 모의를 알게 된 세조는 격노했다. 그리하여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관련자 70여 명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고, 그들의 16세 이상의 아들을 모조리 처형했으며, 15세 이하의 아들과 부인, 식솔들을 공신들의 노비로 삼았다. 특히 성삼문의 가문은 아버지 성승을 비롯하여 형 성삼고, 동생 성삼빙, 성삼성과 조카 등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해 버렸다.

이어서 사육신의 거사를 묵인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시키고 영월로 귀양 보냈다. 얼마 후 금성대군과 순흥 부사 이보흠이 주도한 단종복위운동이 발각되자 단종은 폐서인되었고, 17세에 청령포의 고혼이 되었다. 선혈이 낭자했던 이 비극적인 사건은 후대에 세조의 원죄보다 한명회의 간교함과 세종에 대한 신숙주의 불충을 증명하는 단서로 더 많이 애용되었다.

 

국가 경영 능력을 발휘하다

한명회는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분쇄한 공적으로 그해 겨울 도승지가 되었고, 1457년(세조 3년)부터 조정을 주도하면서 위정자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당시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재상 중심의 의정부의 기능을 축소하는 대신 육조직계제를 실시하여 만기를 친람했다. 또 유명무실했던 체찰사(體察使)

 

1458년, 병조 판서에 임명된 한명회는 평안도와 함경도 변방에 출몰하는 여진족과 야인 부락을 토벌하고 축성작업을 독려했다. 1459년(세조 5년)에는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병권과 관할권을 가진 4도 도체찰사가 되어 지방 수령과 향리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민생을 살폈다.

 

한명회는 이후 세조 재위 14년 동안 총 14회에 걸쳐 전국을 주유하며 지방의 현안들을 처리했고, 승정원과 육조, 변방 등지에서 왕명 출납권과 인사권, 병권 및 감찰권을 마음껏 행사했다. 이는 군왕 세조의 절대적인 신임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1464년(세조 10년)에는 평안북도 의주의 하류에 진보(鎭堡)가 없고 희천과 영흥 사이의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의주에 인산진을 설치하게 했고, 희천과 영흥 사이에는 영원군 설치를 주도했다. 법전의 편찬에도 관여하여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함으로써 성종 대에 완성된 경국대전

위기는 극복하는 것이다

한명회는 1461년 북방을 안정시킨 공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진봉되었고, 1463년 좌의정, 1466년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그렇듯 출세 가도를 달리던 한명회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1466년 회령 절제사 이시애

 

깜짝 놀란 세조는 전례에 따라 한명회와 신숙주를 하옥시킨 다음 조사를 벌였지만 무고임이 밝혀지자 곧 석방했다. 엄혹했던 왕조시대에 역모는 그 혐의만으로도 목숨이 위태로운 중죄였다. 하지만 세조의 굳은 신뢰를 담보하고 있던 두 사람은 아무런 신체적 위해도 입지 않고 옥문을 나설 수 있었다.

그 후 의정부와 충훈부, 육조, 대간 등이 한 목소리로 한명회와 신숙주가 권력을 남용했다며 처벌을 종용했지만 세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야말로 자신의 치세를 지탱하는 철골임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명회는 그 상황을 개인적인 망신으로 여기고 명예회복의 기회를 기다렸다.

 

2년 뒤인 1468년(세조 14년) 9월 7일, 예종남이

그 무렵 혜성이 출현하자 한명회는 반역의 기운을 암시하면서 임금에게 창덕궁의 방비 강화를 진언했다. 때맞춰 예종이 남이를 경원하는 태도를 보이자 기회를 엿보던 유자광은 남이가 백두산 정상에서 썼다는 한시에서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이라는 구절에서 ‘평(平)’을 ‘득(得)’으로 바꾸어 ‘사나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나라를 얻지 못하면’이라는 내용으로 역심을 도드라지게 했다.

그 결과 남이와 영의정 강순 등이 대역죄인으로 체포되어 거열형에 처해졌다. 한명회는 그 과정에서 유자광을 옹호함으로써 약진하던 신진세력을 일거에 제거함은 물론 과거 자신에게 씌워졌던 역모의 어두운 그림자를 깨끗하게 걷어낼 수 있었다.

 

영광의 나날들

한명회는 평생 네 차례 공신에 봉해졌다. 계유정난으로 정난공신, 단종복위운동 처리로 좌익공신, 남이의 옥사를 통해 익대공신, 성종 즉위 후에 좌리공신에 책록되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을 수차례 거쳤고, 두 딸이 왕비가 되어 세조와 사돈이 되었으며, 권람과 신숙주와도 사돈 관계를 맺어 권력 기반을 다졌다.

 

일찍이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는 병약하여 월산대군과 자산군을 남기고 20세에 요절했다. 세조는 며느리 수빈 한씨를 대궐에 머물도록 허락했지만 그녀는 사양하고 사가로 물러났다. 그로 인해 둘째아들 해양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때 한명회는 맏딸을 해양대군과 혼인시켜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런데 딸이 세자빈이 된 지 1년 7개월 만에 인성대군을 낳고 산욕으로 세상을 떠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성대군마저 병약하여 일찍 죽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한명회는 수빈 한씨를 찾아가 사돈을 맺는 조건으로 그녀 소생의 장래를 약속한다. 수빈 한씨는 그 제안을 수락하고 둘째아들 자산군과 한명회의 둘째딸을 혼인시키기에 이른다. 세조로부터 폭빈(暴嬪)이라 불릴 정도였던 여걸과 권신의 밀계였다.

 

1468년(예종 즉위년) 17세였던 해양대군이 즉위하자 한명회는 세조의 유언에 따라 신숙주, 홍윤성, 정인지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어 각종 업무를 처결했고, 병조 판서를 겸했으며 인사권까지 틀어쥐었다.

 

1469년(예종 1년)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 급서하자 한명회는 4세에 불과했던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을 제쳐놓고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이자 자신의 넷째 사위인 자산군을 임금으로 추대했다. 그리하여 수빈 한씨는 대비 자격으로 입궐하게 되었으니, 그녀가 바로 훗날 폐비 윤씨 문제로 연산군과 갈등했던 인수대비이다.

 

면리(面里) 제도를 만들다

성종은 즉위 당시 13세에 불과했으므로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 했지만 실권은 인수대비와 한명회에게 있었다. 당시 한명회는 신숙주, 구치관 등과 함께 원상으로서 국정을 주관했다. 그런데 성종의 정비이자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가 17세의 나이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삼았는데 투기가 심하여 폐출되었다가 사사되기에 이른다.

 

성종 초기에 한명회는 유자광의 공격을 받았지만 흔들리지 않고 국가 원로로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세조 치세에 북방을 안정시킨 경험이 있었던 그는 1479년(성종 10년) 건주위 여진족을 정벌하려던 명나라를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어유소가 추위와 험로를 이유로 퇴각하자 재출병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압록강과 두만강 변에 장성 축조를 건의하여 여진족의 내침을 방지하기도 했다.

 

1480년(성종 10년) 노쇠한 한명회는 은퇴를 결심하고 사직소를 올렸지만 성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1481년(성종 11년) 한명회가 정현왕후의 책봉 주청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황제는 “충직한 노한(老韓)이 다시 왔다.”라며 치하했다. 1484년(성종 15년) 봄 70세가 되어 사직소를 올렸지만 반려되었다. 1485년(성종 15년)에 재차 병을 이유로 사직하려 하자 성종은 “경은 나라의 으뜸 공로자이며 인간적으로는 덕있는 노인이며 사직에는 천주(天柱) 같은 존재다.”라면서 궤장(几杖)을 하사하며 사임을 물리쳤다.

 

말년에도 한명회의 지략은 녹슬지 않았다. 그는 조정의 행정력이 민간에 고루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주민들의 자치 조직인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갈매기와 노닐고자 했지만

1485년(성종 15년) 한명회는 종묘사직을 위해 평생을 바쳤으니 이젠 유유자적하겠다는 뜻으로 한강변에 ‘압구정(鴨鷗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선비들과 함께 시흥을 즐겼다. 갈매기가 노닌다는 뜻의 정자 이름은 명나라의 문객 예겸이 지어준 것이었다.

 

 

압구정도

 

한명회의 정자인 압구정을 그린 압구정도(18세기 겸재 정선 작)

 

 

한명회는 이렇듯 낭만적인 시구로 노년을 보내고자 했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부원군의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하고 있었으므로 압구정에는 매일 조정 신료와 벼슬을 탐하는 무리들이 몰려들어 아첨을 일삼았다.

 

그 때문에 이윤중이란 선비는 다음과 같은 시로 그를 조롱했다

 

여기에서 ‘목후’란 《사기》의 ‘목후이관(沐侯而冠)’에서 나온 말로 부귀를 이루고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은 항우를 일컫는 말이다.

 

압구정은 겸재 정선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단아한 숲 사이로 한강이 내다보이는 정취가 고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얼마 후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사신이 그 소문을 듣고 구경을 청하자 한명회는 정자가 좁다는 이유로 성종에게 궁중에서 사용하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요청했다.

 

한데 당시 한명회의 권력 남용에 불만을 품은 성종이 야멸차게 거절하자 빌미를 잡은 대간과 사헌부에서 그를 강력하게 탄핵했다. 그 결과 한명회는 모든 관직이 삭탈되고 유배형에 처해졌지만 배소로 가던 도중 사면되어 풀려났다. 아름다운 압구정은 갈매기와 노니는 장소가 아니라 추락하는 권세의 날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책사인가, 참모인가

1487년(성종 17년) 한명회가 병석에 눕자 성종은 날마다 의관과 신하들을 보내 문병하게 했다. 그해 11월 14일, 최후를 직감한 한명회는 성종에게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나중에는 게으른 것이 사람의 상정이니 원컨대 나중을 삼가기를 처음처럼 하소서.”라는 말을 남기고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은 그의 생애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처럼 한명회는 평생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리다 이승을 떠났지만 저승에서는 편히 쉬지 못했다.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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