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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 과 사 전

권력의 변화,신이주신 권력 ~계약

권력의 변화, 신이 주신 권력 → 계약

중세의 지배 권력이 교회였다면, 근세의 지배 권력은 왕권이었다. 물론, 왕권도 종교적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대주교가 주관하는 대관식을 반드시 거쳐야 국왕의 즉위 명분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중세와는 달리, 근세의 절대왕정에서는 신(神)으로부터 직접 즉위 명분을 찾았던 것이다. 

종교권력이 쇠락하면서, 국왕들은 절차적 명분을 걷어치우고 직접 '신의 아들'을 자처했고, 1516년 볼로냐 정교 협약을 필두로 국왕들은 주교·수도원장 임명권도 직접 장악했다.

이것이 이른바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이다. 국왕은 절대자였고, 한 마디로 "짐이 곧 국가(L'Etat, c'est moi)"였다. 산업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이 발생하는 18세기가 될 때까지, 국왕은 오로지 신 앞에서만 책임을 지는 신성불가침의 존재였다,

산업혁명 이후 재산을 축적한 부르주아지들은 서서히 자신의 권리를 자각한다. 아울러 국왕의 절대 권력에 맞서기 위한 이론적 틀이 나타나면서 세상은 다시 한 번 뒤바뀐다. 

따라서 산업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은 시대가 통째로 바뀌는 전환기적 사건이라고 할만 했다. 국왕의 권력이 무너지면서, 자연과학과 공화주의가 대표적 지배 이론으로 자리 잡는 근대가 열린 것이다.



사회계약론(Theory of Social Contract)은 왕권신수설에 대항하기 위한 대표적인 이론이었다. 발단은 토마스 홉스가 1651년 발표한 저서 '리바이어던(Leviathan)'이었다. 

홉스는 인간의 본질을 통찰했다. 홉스는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고, 자기 보호를 최우선으로 여긴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세상에 대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규정했다. 

홉스는 이와 같은 인간관을 토대로 권력의 본질을 '계약'으로 규정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부터 질서와 규율을 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을 필요로 했고, 그 강력한 힘은 국민과 통치자 간 계약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었다. 

리바이어던(Leviathan)은 계약에 따라 강력한 힘을 부여받는 대리인의 존재를 말한다. 그리고 그 리바이어던은 국가였다. "권력을 신으로부터 보장받는다"는 왕권신수설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주장이었다.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형성된 절대적 지배자인 신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과 필요 때문에 권력을 부여받는다는 획기적인 주장을 한 것이다. 

이후 사회계약론은 존 로크·장 자크 루소의 손을 거쳐 정교해진다. 존 로크는 '계약 해지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지도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얼마든지 기존 계약을 해지하고 새 계약을 맺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루소는 산업혁명 이후 사유재산의 유무가 계급의 척도가 되던 새로운 사회 변화를 주목했다. 루소는 "사유재산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체계를 토대로 '계약'을 체결해 갈등과 경쟁을 부추긴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공동체의 선을 지키기 위한 의지들이 법제화돼 주권이 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는 법에 대한 복종의 의무가 발생한다. 

이렇듯 서양에서 발현한 사회계약설은 동양에서도 오래 전에 회자됐던 이론과 유사한 면이 있다. 맹자는 각각 하나라 걸왕·은나라 주왕이라는 폭군을 몰아내고 지배자가 된 은나라 탕왕·주나라 무왕을 긍정했다. 

그리하여, 맹자는 "걸주(桀紂)가 아무리 폭군이었어도, 신하가 어떻게 임금을 시해하느냐"는 제나라 선왕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고 합니다. 잔적지인(殘賊之人)을 단지 '그놈(一夫)'이라고들 하니, '무왕께서 그놈을 베었다'라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하였다'라는 말은 들어 본 바 없습니다."

맹자는 국왕 앞에서 "임금이 인의를 해치면 일개 '그놈'으로 격하될 뿐인데, '그놈'을 죽인다는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는 패기를 내세운 것이다. 

이것이 맹자가 체계화해 널리 주장한 역성혁명(易姓革命)이다. "부도덕한 통치자는 언제든지 몰아낼 수 있고, 그와 같은 반기는 역적모의가 아니"라는 취지의 주장이다.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도 "군주는 배고, 백성은 물"이라면서,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기도 한다"며 역성혁명을 긍정한 바 있다. 맹자와 마찬가지로, 부도덕한 통치자에 대한 저항을 긍정한 것이다.

맹자를 특히나 존경하고 사랑했던 대표적인 학자가 삼봉 정도전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문세족의 부패로 국운이 기울던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설계하기까지, 사상의 기저에는 맹자의 역성혁명론과 민본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정도전도 저서 '삼봉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라와 임금은 백성을 위해 존재할 때만 가치가 있다."

왕의 절대 권력에 대해서는 동·서양의 구분 없이 저항과 교정의 노력이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나 정도전은 재상총재제를 통해 "왕이 아닌 재상이 더 많은 통치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혈통으로 승계하는 왕권이 언제나 올바를 가능성은 떨어진다"는 의심을 토대로 재상총재제를 주장한 것이다. 왕권을 견제하려고 했던 노력은 훗날 서양에서 왕권신수설에 대항했던 사회계약론자들의 취지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그렇듯 근세가 무너지고 근대가 열리면서, 유럽의 지배 사조는 송두리째 바뀌었다. 신이 주신 사명으로 국왕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세상은 뒤안길로 사라졌고, 잉여재산을 축적한 부르주아지와 자연과학의 세상이 도래했다.

법률 해석에 자연과학의 체계를 도입한 법실증주의

근대에 접어들면서, 이론가들은 법의 객관성과 엄밀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왕권신수설을 토대로 자의적 통치를 했던 절대군주에 대한 반박이자, 반작용이었다.

그리하여 법은 곧 국가로 인식됐다. 법을 엄격하게 해석해 공권력 집행의 정당성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정치적·상황적 맥락을 배제하고, 자연과학적인 사고의 틀에 따라 실정법의 해석과 적용을 중시하는 취지의 사고가 도래한 것이다. 이것이 '법실증주의'이다.

켈젠은 심지어 "모든 국가작용은 법질서를 실현시키기 위한 법 작용"이라는 취지의 주장을 하기도 했다. 켈젠은 법률과 통치 중 법률을 상위에 놓고, "통치는 단지 법률을 통해 인간의 행동양식을 지정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법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했던 절대군주에 대한 반발로, 법률을 엄격하게 판단해 최상위가치로 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의 기본권에 대해서는 단지 "국가권력이 베푸는 은혜" 정도로만 규정됐다는 점에서, 훗날 많은 비판을 받고 주된 취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후 헌법·법률 해석의 관점은 결단주의를 거쳐 통합주의를 지향하게 된다. 결단주의를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 칼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을 몸소 경험하며, 강한 결단으로 혼란을 수습하는 국가의 힘을 강조했다.

칼 슈미트는 "국가는 이미 존재했고, 시민의 권리는 국가권력을 제한할 뿐 창설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서 칼 슈미트의 주장에서는 국가와 사회(시민의 기본권)가 분리되는 것이고, 헌법은 헌법제정권자(국민)의 정치적 힘과 의지에 따른 결단으로 형성되는 것이었다.

국민이 선거로 선출한 통치자는 곧 국민과 동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통치자의 결단은 곧 국민의 결단으로 해석된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나치즘과 상당한 수준에서 일맥상통한다. 결국 칼 슈미트는 나치에 부역한다.

하지만 칼 슈미트의 주장은 그래도 여전한 의미를 갖는다. 시민의 국가권력 제한을 강조하고, 권력의 분립 필요성을 강조했던 취지만큼은 현대사회에서도 큰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 슈미트가 나치에 협력하고, 나치가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총통"을 주장하면서 권력분립 따위는 큰 의미를 잃었다는 사실은 그 빛을 잃게 한다.

이후에는 스멘트를 중심으로 한 통합주의 사고관이 대두된다. 쉽게 말해 "국가는 통합과정이고, 헌법은 통합을 위한 기본적 법질서이자 생활질서로서, 일정한 가치체계를 토대로 한 연대의식으로 꾸준히 통합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헌법을 일컬어, 서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틀 안에서 더불어 살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담론을 놓고 갈등하고 토론하며 결론을 내는 과정 자체를 통합을 위한 절차로 해석한 것이다. 헌법은 통합을 위한 기본 질서로 해석된 것이다. 

그런 변화 속에서 헌법 구조의 중요한 장치로 자리 잡은 것이 바로 삼권분립이다. 삼권분립의 기초는 법실증주의로부터 시작된다. 존 로크는 행정·입법의 이권분립을 주장했고, 몽키스테외가 저서 '법의 정신'(1748)에서 삼권분립을 주장한 것이다. 

물론 삼권분립은 엄밀하게 지켜지기는 어렵다. 각국의 특성에 따라, 행정·입법·사법 중 더 큰 무게가 주어지는 시스템이 형성될 수도 있다. 대한민국은 행정부 우위의 삼권분립 체계가 유지되고 있는 편이다. 

삼권분립의 기초는 절대군주의 권력을 견제하고자 했던 법 실증주의적 사고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부르주아지들이 독점적 권력을 차지하면서 입법부와 행정부는 사실상 한 몸처럼 돼 오히려 입법부가 유명무실해지는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는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삼권분립은 현대 민주주의와 헌법의 핵심이다. 그리고 우리 헌법 곳곳에도 삼권분립의 원리는 녹아 흐르고 있다.

그리고 헌법재판소 재판관 정족수 9명은 삼권분립의 형식적 취지가 잘 살아 있는 '삼권분립 준수' 선언의 핵심이었다.

삼권분립 의지의 표현, 헌법재판소

우리 헌법에서 헌법재판소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60년 6월 15일 제3차 헌법 개정이었다. 하지만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실제로 설치되지는 못했고, 실제 헌법에 명시돼 설치된 계기는 1987년 10월 27일 제9차 헌법 개정이었다.

익히 알려졌듯이, 헌법재판소의 재판관 정족수는 9명이다. 헌법재판소의 설치 전 헌법위원회·탄핵심판위원회 등의 형태로 명맥이 유지되던 시절에도 정족수는 기계적인 배분을 중시했다.

① 제헌헌법의 헌법위원회 : 부통령이 위원장, 대법관 5명, 국회의원 5명으로 구성

② 제3차 개정헌법 당시 헌법재판소의 구성 예정 틀 : 대통령·대법원·참의원(상원)이 각 3명씩 선임

③ 1962년 제4차 개정헌법 당시 탄핵심판위원회 : 대법원장이 위원장, 대법원판사 3인, 국회의원 5인으로 구성

④ 유신헌법의 헌법위원회 : 대통령·국회·대법원장 3인씩 선출 혹은 지명해 대통령이 임명

⑤ 현행 헌법재판소 : 대통령·국회·대법원장 3인씩 선출 혹은 지명해 대통령이 임명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자 행정부의 수장이다. 국회와 대법원장은 각각 입법부와 사법부를 대표한다. 즉, 삼권이 3명씩 균등하게 선출 및 지명한다. 국회도 선출할 수 있는 3명은 각각 여당 추천·야당 추천·합의 추천 등으로 구분된다. 국회 내 여야의 균형을 맞추고자 한 것이다.


행정부의 수반 대통령.  입법부의 수반 국회의장.  사법부의 수반 대법원장.



출처: https://sharpsharpnews.tistory.com/940 [로디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