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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指導者. 大望

오늘은 윤봉길의사 의거 81돌

 

●오늘은 윤봉길 의사 의거 81돌◎ 
  

 

 


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시인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본명은 윤우의(尹禹儀), 호는 매헌(梅軒)이고,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생애 초기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광현당에서 태어났다.     

 


 1932년 4월 29일, 81년 전 오늘은 윤봉길                                                      

   (1908. 6. 21 출생 24살로 의거 순국)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지금은 노산공원)에서                                                               
      일제의 조선침략을 만천하에 응징한 날입니다.                                                    
 
           “제가 채소 바구니를 등 뒤에 메고 날마다  
                                        
            홍구 방면으로 다니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중략)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마땅히 죽을 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동경 사건과 같은 경륜이 계실 줄 믿습니다.
            저를 믿으시고 지도하여 주시면 은혜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위는 ≪백범일지≫에 나오는 이야기로 백범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의 만남 장면입니다.


            거사 당일인 4월 29일 새벽 백범은 윤봉길 의사와 마지막 식사를 합니다.
            식사가 끝나고 거사 장소로 나서기 전 윤봉길 의사는 앞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1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면서 자신의 6원짜리 시계를 백범에게 주고
            자신은 백범의 2원짜리 시계를 찹니다.
 
            그리고 백범과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현장으로 떠나지요.
            의거 직후 현장에서 일경에게 붙잡힌 윤봉길 의사는 5월 25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2월19일 24살의 젊은 나이로 숨져갔습니다.


            중국 장개석 총통이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고 높이 평가했고
            이를 계기로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일본 국회의원들이 야스쿠니를 떼 지어 참배하고
            아베신조 일본 총리의 조선 침략 사실을 부정하는 망언을 접하면서
            또다시 아시아 평화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는 이때에
            윤봉길 의사의 목숨을 건 저항 정신을 되새겨봅니다.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으로 반일 감정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 신문을 통해 최초 보도돼 70여년 이상 그대로 받아들여온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직후 체포 모습이 거짓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강효백 교수, "윤봉길 의사 체포 사진 조작된 것"
  
중국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강효백 경희대(국제법무대학원) 교수는 17일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 당시 해외 신문의 관련 기사를 살펴본 결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체포 모습과는 전혀 달랐던 것을 알게 됐다"며 "일본군에 의해 심하게 구타를 당해 망신창이가 됐음에도 의연했던 윤봉길 의사의 모습이 조선인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해 다른 사람을 체포하는 사진으로 조작된 것"이라고 <프레시안>에 밝혔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상하이(桑海) 홍커우(虹口)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겸 전승 축하 기념식에 수류탄을 도시락에 숨겨 몰래 가지고 들어가 단상에 투척했다. 이 의거에 당시 상하이 일본 거류민 단장 가와바타와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로카와 대장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 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이 의거는 당시 침체일로를 걷던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커다란 활기를 불어넣어 줬고, 중국 정부에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일본 <아사히신문>이 이틀 후인 5월 1일자 호외를 내면서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당시 <아사히신문>은 현장 사진으로 전면을 편집하였으며, 뒷면에 간략한 기사와 함께 관계 사진을 다수 실었다.
  
한때 교과서에도 실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윤봉길 의사의 체포 당시 모습은 이 <아사히신문> 5월1일자 호외 전면 하단에 실렸던 것. 사진 속 윤봉길 의사는 바바리코트 차림에 중절모까지 집어 들고 온전한 상태로 일본군에 둘러싸여 호위되다시피 걸어 나오고 있다.
  

 

▲ 일본 <아사히신문> 5월 1일자 호외 전면에 실린 윤봉길 의사의 체포 모습. ⓒ프레시안



  당시 <상하이타임스>, "주먹, 군화, 몽둥이로 온몸 망신창이"
  
하지만 강효백 교수는 이런 <아사히신문>의 사진과는 전혀 다른 정황을 기록하고 있는 당시 해외 신문의 관련 기사를 다수 발굴해냈다.
  
먼저 당시 화둥(華東) 지방 최고 권위지였던 <상하이타임스>의 4월30일자 기사를 살펴보면, 이 신문은 당시 정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폭탄이 터진 후) 회오리바람이 소용돌이치는 군중들 사이에 조선 사람 윤봉길이 있었다. 그는 군경들에 의해 구타당해 쓰러졌다. 주먹, 군화, 몽둥이가 그의 몸을 난타했다. 만일 한 사람이 죽게 된다면 바로 그 조선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곧 그 회색 양복은 갈기갈기 찢겨져 땅에 떨어졌다.

 

잠시 후 그 한국인은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의 몸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총검을 가진 군경들이 그가 쓰러져 있는 곳에 비상 경계선을 치고 군중들로부터 그를 차단했다.

 

군경들이 비상 경계선 안에서 그를 감시하였다. 곧 차 한 대가 나타났다. 그 조선인은 (일본군에 의해) 머리와 다리가 들려 짐짝처럼 통째로 차 뒷좌석에 구겨 넣어졌다. 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 의거 후 윤봉길 의사의 참혹했던 체포 장면을 보도한 <상하이타임스> 4월 30일자. ⓒ프레시안



  5월3일 발행된 <노스 차이나 해럴드>도 마찬가지 상황을 전달하고 있다.
  
"폭탄 투척자(윤봉길)의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은 분노하였다. 그들은 그를 붙잡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으며 주먹으로

 몰매를 때리고 그의 옷을 찢어내었다…그는 머리에서 허리께까지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강효백 교수는 "당시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다룬 모든 신문이 공통적으로 '현장에서 체포돼 집단으로 잔혹한 구타를 해

윤봉길 의사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고 옷차림이 엉망진창으로 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며 "<아사히신문>의 사진은

현장에 있었던 다른 사람을 체포하는 사진"이라고 주장했다.
  
  "현장에서 윤 의사 말고도 체포된 사람 수십 명"
  
이런 강효백 교수의 지적은 당시 현장 정황과도 부합한다. 당시 관련 보도를 추적한 결과 의거 직후 현장에서 윤봉길 의사와 함께 체포된 자는 최소한 5명 많게는 4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당시 상하이에서 발행된 <신보>는 4월30일자 1면에 "(윤봉길이라는 조선 사람 외에도) 엄밀한 수사를 위해 중국인 및 기타 외국인 8명도 현장에서 체포됐으나 본 사건과 관계가 없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중국 <중앙일보>도 5월1일자에 "일본 총영사관은 29일에 홍커우 공원에서 체포당한 사람은 대부분 석방됐으며, 아직 석방되지 않은 사람 가운데는 조선인 7명, 중국인 5명이 있다고 발표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실제로 <조선일보> 1998년 3월1일자에 따르면 "명지전문대 김장춘 교수의 아버지 김성일(1968년 작고)씨가 1932년 윤봉길 의사와 함께 체포돼 4개월간 고문을 받았다"는 증언도 나와 있는 상태다.
  
당시 현장에 있던 많은 조선인, 중국인 등이 윤봉길 의사와 함께 체포됐고 <아사히신문>은 이런 체포 사진 중 하나를 윤봉길 의사의 것이라고 속였다는 것이다.
  
  "의거 전후 사진 완전히 달라, <아사히신문> 뒷면 사진은 전혀 다른 인물"
  
이런 강효백 교수의 주장은 의거를 전후한 윤봉길 의사의 사진을 비교하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 거사를 전후해 윤봉길 의사가 찍은 사진. 위의 2장과 아래 <아사히신문>에 나온 사진 2장은 눈에 띄게 모습이 다르다. 회색 양복 차림의 만24세의 앳된 청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앞의 2장과 달리 <아사히신문>의 사진은 거의 중년에 가까운 모습이다. ⓒ프레시안



의거를 전후해 윤봉길 의사의 것으로 알려진 사진은 총 4장이다. 현재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려 있는 거사 3일전 태극기 앞에서 수류탄을 들고 찍은 사진, 거사 당시의 윤봉길 의사 사진 그리고 <아사히신문> 호외의 전면과 뒷면에 각각 보도된 체포 당시의 사진 2장이다. 특히 <아사히신문>의 뒷면에 실린 체포 사진의 경우에는 윤봉길 의사가 매우 비겁하게 묘사돼 있어, 거사 후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 "내가 폭탄을 던졌다"고 말했을 정도로 당당했던 윤봉길 의사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다.


강효백 교수는 "상하이 주재 한국 총영사관에서 근무할 당시 상하이 의대 부속 화둥의원 정형외과팀 등에 의뢰해 두 사진을 비교한 결과 귀 생김새가 전혀 다른 것을 포함해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지적했다.
  
  "일본인 절대 윤 의사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기본 사실부터 바로잡아야"

 

효백 교수는 "당시 신문은 물론 한국과 중국의 많은 문헌들을 살펴본 결과 이 사진은 조작됐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며 "당시 일본이 참혹하면서도 당당한 윤봉길 의사의 모습이 조선인에게 미칠 엄청난 영향을 우려해 사진을 조작한 것"이라고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렇게 조작된 사진은 윤봉길 의사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반면, 폭탄 투척범을 인도적이고 신사적으로 연행하는 일본 군경의 모습을 선전해 일제의 대내외적 이미지를 높이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아사히신문> 뒷면에 실린 윤봉길 의사 사진을 확대한 것(오른쪽). 한눈에 보기에 도 달라 보인다. ⓒ프레시안



한편 이미 1997년에 유족 다수가 이 사진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윤봉길 의사의 동생인 윤남의 옹이 "윤봉길 의사가 맞다"고 주장해 결론을 내리지 못한 바 있다. 고 윤남의 옹은 거사 당시 18세로 2년 전인 16세 때 윤봉길 의사와 헤어진 뒤 만나지 못했다.


이런 강 교수의 주장에 대해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이미 수년 전부터 논란이 제기됐으나 사실상 진짜 사진 으로 결론이 났다"며 "사업회 입장에서도 그 부분에 대해서 특별히 문제제기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답했다. 하지만 강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강 교수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터무니없는 윤봉길 의사의 체포 사진에 대해서 지금까지 아무도 의구심을 안 가졌던 것은 '일본인은 적에게 관대할 것'이라는 친일관이 암암리에 작용했을 것"이라며 "독도 문제로 한참 시끄러운데 이런 기본적인 것부터 제대로 바로잡을 때 비로소 일본에 대해서도 당당할 수 있는 것"이라고 문제제기의 이유를 밝혔다.
  

 

 

                            

                          양손에 권총과 폭탄을 들고, 절명사(絶命辭)를 가슴에 붙인체 태극기 앞에서 촬영

 

 

 

 

 

 

       사형 집행 직전과 직후의 얼굴 표정에 변화가 없다.  특히 사형 직후, 총알이 이마 한가운데를

 

     관통했는데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그저 존경스럽기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