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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속의 좋은글

사랑방 이야기

사랑방 이야기

 

사랑방 이야기 삼월이

 

사랑방 이야기(101)삼월이

 

 박 장군 댁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그 정정하던 안방마님이 빙판에 넘어져 꼼짝 못하고 드러누운 것이다. 박 장군의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도 한풀 꺾여, 매일 사냥을 다니던 발길도 끊고 부인 병수발에 매달렸다. 목관(牧官)으로 한평생 봉직하고 물러난 박 장군은 오십줄에 들어섰지만 아직도 쌀 한가마를 번쩍 들어올리는데, 부인 병수발에 꼼짝도 못하니 죽을 지경이다.

살판난 사람이 하나 있다. 박 장군의 며느리다. 시집살이하던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드러누웠으니 꺼릴 게 없다. 입 무거운 시아버지 박 장군은 며느리에게 잔소리할 위인이 아니요, 남편은 함경도 변방에서 군 복무중이라. 입속의 혀 같은 몸종 삼월이까지 옆에 있으니 제 세상이 온 것이다.

엉치뼈에 금이 가 일어나 앉지도 못하는 시어머니가 두해째 누워 있으니 엉덩이에 욕창이 생겨 안방에는 악취가 진동을 한다. 안방에 붙어 있는 사람은 박 장군과 삼월이뿐이다.

며느리 옥천댁은 시어머니 약사발을 들고 안방에 들어왔다가 코를 틀어쥐고 뛰쳐나가 꾸웩꾸웩 토를 했다. 그 통에 약사발이 쏟아져 환자의 몸을 닦던 삼월이가 쏟아진 약을 닦아도 박 장군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며느리 새댁이 시집올 때 데리고 온 몸종, 삼월이는 새댁보다 두살 아래로 어릴 때부터 새댁의 명에 못하겠다고 말해본 적이 없다. 시집에 데리고 와서도 “삼월아, 얼음 깨고 노란 미나리 베어 와서 살짝 삶아 무쳐다오.” “삼월아, 내 목간 준비해라.” “삼월아~ 삼월아~.”

요즘은 삼월이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박 장군을 도와 물수건으로 안방마님 몸을 닦으랴, 대소변을 받으랴, 속옷을 갈아입히랴, 그 와중에도 새댁은 별채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어느 날, 새댁이 깜짝 놀랐다. 삼월이가 헛구역질을 했다. 새댁이 삼월이와 바짝 마주 앉았다. “삼월아, 아비가 누구냐?”

삼월이는 고개만 떨군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총각 하인 마당쇠냐? 집사냐? 말 좀 해봐라 말 좀!” 새댁은 집안 남자들을 모두 뒤꼍으로 불러 세웠다.

“삼월이 아비가 누군지 앞으로 나와! 내가 내년 봄에 혼례식을 올려줄 것이야!” 아무도 나서지 않자 악을 쓰며 “꼭 밝혀질 거야. 그때는 작두로 그걸 잘라 버릴 거야!”


백방으로 알아봐도 삼월이 뱃속 씨앗의 아비는 밝혀지지 않았다.

새댁은 한의원에 가서 애 떨어지는 약을 한 첩 지었다. 삼월이에게 먹일 약을 삼월이한테 달이라고는 할 수 없어 이튿날 몸소 낙태시키는 약을 달이기 시작했다. 약사발을 들고 삼월이를 불렀지만 집안 어디에도 없었다.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하인들을 시켜 삼월이를 찾으러 보냈지만 허사였다.

삼월이가 사라지고 난 뒤 당장 불편해진 건 부인 병수발을 드는 박 장군이었지만, 더더욱 불편해진 것은 새댁이다.

그때, 박 장군 부인이 세상을 떴다.


꽃 피고 새 울고, 장맛비에 호박순이 쑥쑥 자라고, 우수수 낙엽이 흩어지고, 북풍한설 몰아치며 어느덧 5년이 흘렀다. 상복을 벗어 불사른 박 장군은 이삼일씩 집을 비웠다. 새댁이 박 장군 댁의 안주인이 되었다.

초설이자 서설이 펄펄 내리던 어느 날, 가마 하나가 박 장군 댁에 들어섰다.

하인 하녀들과 새댁이 나와 낯선 가마를 에워쌌다. 가마 속에서 우아한 여인네가 대여섯살 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내렸다. 5년 전에 사라졌던 삼월이다. 박 장군이 사랑방에서 나오자 삼월이의 손을 잡고 있던 아이가 “아버님, 저희가 왔습니다” 하면서 두손 모아 허리를 굽혔다. “네 형수에게도 인사드려라.” 아이는 새댁에게 “형수님, 처음 뵙겠습니다
공손히 인사를 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는 새댁에게 박 장군은 삼월이를 가리키며 “오늘부터 너의 시어머니다.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깍듯이 모시렸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자 “네, 아아아버님….”

새댁은 쩔쩔매는데 삼월이는 꼿꼿이 서서 “에미야 따뜻한 물 한사발 떠오너라.” 새댁이 뒤돌아보자 박 장군이 새댁에게 일갈 “너 보고 하는 소리야.” 새댁이 “네, 어머님” 하며 부엌으로 가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술 취한 발걸음이더라.

 

 

 

# 사랑방 이야기 (102) 물방개

 

우아한 여인이 천박한 송사를 제기했다.

낳은 지 한달도 안된 아이를 안고 와 아이 아비를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지목하는 아비는 무려 다섯이니, 다섯 남정네와 살을 섞었다는 얘기다.

재미있는 사건이라 사또가 그 여인을 직접 만나봤다.

여인이 자필로 쓴 소장을 받아든 사또는 더더욱 호기심이 동했다.

필력이 상당할 뿐 아니라 그녀의 행동거지도 막돼먹지 않았다.

사또는 서른두살 다래댁의 내력부터 듣기로 했다.

다래댁은 부자는 아니었어도 뼈대 있는 집안에서 자랐다. 조부로부터 <사자소학>까지 배우고 엄한 부모 밑에서 조신하게 신부수업을 받아 양반집에 시집을 갔다.

그런데 신랑이란 사람이 키만 컸지 피골이 상접한 데다,

좁은 어깨는 올라가고, 손가락은 길었으며, 핏기라고는 없는 백면서생이었다.

첫날밤에 신부 옷고름도 풀 줄 몰랐다.

신랑은 며칠 후 술 냄새를 풍기며 신부 옷을 벗기고 기어오르더니 껍적거리다가 픽 쓰러졌다.

다래댁 다리 사이가 미끄덩거리고 밤꽃 냄새만 지독하게 온 방을 채웠다.

새신부 다래댁이 무얼 알았겠는가.

이것이 신랑 신부의 합방인가보다 추측만 했다.

신랑이란 게 책만 읽고 이렇게 신부 곁에 오기는 가뭄에 콩 나듯이 뜸했다.

결국 5년 만에 다래댁은 아이를 못 낳는 석녀로 낙인찍혀 시집에서 쫓겨났다.

다래댁은 바느질 솜씨 하나로 이집 저집 다니며 대갓집 침모 생활을 했다.

그러다 삼년 전에 천석꾼 부자 최 참봉 댁의 침모로 들어가 이때껏 지내오고 있었다.

몇년 전부터 다래댁 속옷 속에 벌레가 기어다니는지 온몸이 근지럽고 열이 올랐다.

방물장수 아줌마에게서 목신 하나를 사고부터는 밤마다 그냥 자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무언가 허전했다.

어느 여름날 밤,

다래댁은 뒤뜰 우물가에서 멱을 감는 총각 머슴인 마당쇠의 양물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목신을 찾았다.

최 참봉의 막내 삼촌이 상을 당해 온 식구들과 하인이 고개 너머 상가에서 밤을 새운 날,

침모 다래댁은 술상을 차려 마당쇠 방을 찾았다.

요란한 밤을 지새우고 동창이 희끄무레 밝아 올 때 제 방으로 기어들어온 다래댁은 기분 좋은 녹초가 됐다.

 

안방마님이 친정엄마 문병을 간 날 밤에는 최 참봉이 침모 방으로 들어왔다.

다래댁은 저항하는 시늉만 하고 몸을 허락했다.

그녀는 마침내 남자를 알았고 잃어버린 세월이 억울했다.

다래댁은 자신이 석녀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다.

남자를 거리낌 없이 섭렵했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인가.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래댁이 석녀가 아니라 전 신랑이 씨 없는 수박이었다.

다래댁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비를 꼭 집어 가려낼 수 없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습관으로 일기를 꼬박꼬박 썼으나 일기를 봐도 아비를 알 길이 없었다.

몸을 섞은 다섯 남자가 모두 자기는 아비가 아니라고 발뺌하니 사또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다섯 남정네가 누구누군가?”

사또가 묻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다래댁이 한참 뜸을 들이다 실토했다.

최 참봉과 마당쇠를 제외한 나머지 세사람은 감나무를 타고 담을 넘어온 뒷집 박 서방, 행랑아범,

그리고 최 참봉의 열일곱살 아들이었다.

사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래댁, 그 아이 아비가 최 참봉이라면 최 참봉 아들은 제 어미를 범한 것이야.”

다래댁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쇤네가 석녀가 아니라는 걸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요.”

“아무리 뜯어봐도 누구를 닮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지?”

“네.”

사또가 다래댁 일기를 토대로 다섯 남정네의 합방 횟수를 꼽았다.

최 참봉이 22번, 마당쇠가 16번, 박 서방이 5번, 행랑아범이 4번, 최 참봉 아들이 2번이었다.

다음날이 고을 장날이었다.

이방이 물방개 야바위꾼을 데려왔다.

그리고 합방 횟수를 반으로 나눠 칸을 만들고 물방개를 가운데 떨어뜨렸다.

그런데 물방개가 뱅글뱅글 돌다가 쏙 들어간 곳이 하필이면 두칸밖에 안되는 행랑아범이었다.

합방 횟수에 오십냥씩 곱해 최 참봉은 천백냥, 마당쇠는 새경을 미리 당겨 팔백냥,

뒷집 박 서방은 이백오십냥, 최 참봉 아들은 백냥, 합쳐서 이천이백오십냥을 거둬

홀아비 행랑아범 단봇짐에 넣어줬다.

행랑아범이 앞서고 아이를 업은 다래댁이 뒤따라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세식구는 멀리멀리 떠났다.

 

# 사랑방이야기(103) 의형제


동네 아이들이 왁자지껄하며 저수지에서 썰매를 타다가 얼음이 깨졌다.

승열이가 빠져 얇은 얼음판에 두 팔을 걸친 채 사색이 돼 달달 떨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도망쳐 둑으로 올라가 발만 동동 구르는데, 팔목이가 논두렁에서

허수아비를 뽑아 얼음이 깨질세라 헤엄치듯 기어서 승열이에게 다가가 그를 건져올렸다.

그때 기별을 받은 승열이네 식구들과 하인들이 달려와 기절한 승열이를 업고 집으로 내달렸다.

그것이 인연이 돼 산비탈 초가삼간에서 입에 풀칠하며 목숨을 이어가던

팔목이와 절름발이 그의 아버지, 벙어리 엄마는 천석꾼 부자인 승열이네 집으로 들어와

아버지는 행랑아범이 되고 엄마는 찬모가 됐다.

승열이 아버지의 주선으로 열두 살 승열이와 열한 살 팔목이는 의형제를 맺었다.

승열이와 팔목이는 함께 서당에 다녔지만 둘 다 공부와는 담을 쌓고 개구쟁이 짓에만 앞장섰다.

팔목이 열여섯 살 때, 승열이네 집 집사가 됐다.

집사였던 승열이의 외사촌이 치부책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도망쳐 팔목이가 후임으로

치부책을 건네받은 것이다.

천석꾼 부잣집 외동아들 승열이의 혼례식이 고을이 떠들썩하게 치러지고 나서 이듬해 팔목이에게도 혼처가 생겼다. 소작농 오 생원의 얌전한 둘째 딸과 팔목이 사이에 혼담이 오갔다. 허나 혼례를 치를 형편이 못 됐다. 혼례식이야 냉수 한 그릇 떠놓고 올린다 해도 행랑채 단칸방에 네 식구가 살 수는 없는 법.

어느날 밤, 승열이와 팔목이는 장터에서 술이 취해 집으로 돌아오다가 동네 어귀 주막에서 또 술을 마셨다.

팔목이가 조심스럽게 승열이에게 방 한 칸 세 얻을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하자 승열이가 대뜸 한다는 말이

이랬다.

“맨입으로?”

“그럼 어떻게 할까?”

팔목이가 물었더니 승열이 입에서 도저히 믿지 못할 말이 나왔다.

“방 한 칸 세 얻을 게 아니라 아예 집을 사 줄게.

그 대신 나에게 초야권(初夜權)을 줘.”

팔목이는 집을 사 준다는 데 놀라고 연이어 초야권이라는 말에 뒤통수를 찍힌 듯 멍해졌다.

“초야권이라니?”

“첫날 밤, 네 색시를 내가 데리고 자겠단 말이야.”

팔목이는 사흘을 곰곰이 생각했다.

섭섭하고 화가 치밀었다.

이런 생각도 했다.
‘좋다. 기회를 봐서 네 색시도 무사하지 않을 게야.’

팔목이는 받아들였다.
저잣거리에 아담한 집을 장만하고 집 문서를 받아들었을 땐 온 세상이 자신의 것처럼

가슴이 부풀어올랐지만, 초야권을 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불덩이가 됐다.

팔목이의 혼례식 날, 신랑은 찌푸리고 엉뚱하게도 승열이가 싱글벙글했다.

늦은 밤, 술이 떡이 된 신랑 팔목이는 주막 객방에서 쓰러지고 승열이가 남몰래 신방으로 들어갔다.

며칠 후, 팔목이는 몰래 집을 팔았다.

새색시를 친정으로 보냈더니 장모가 팔목이를 불렀다.

긴 한숨을 토하며 한참을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내 딸에게 무슨 결함이라도 있는가?

첫날밤엔 신부 옷고름도 풀지 않고 책만 보더니.”

팔목이 깜짝 놀랐다.

“뭐라고요!”

‘승열이가 장난을 쳤구나.’

신부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날 밤이 바로 첫날밤이 됐다.
이튿날 팔목이는 요 위의 붉은 핏자국을 보고 희색이 만면해 신부 손을 잡고 고향을 등졌다.

단봇짐 속에는 집 판 돈이 들어 있었다.

십 년하고도 몇 년이 더 흐른 어느 날.

제물포의 거부 박 대인집 대문 앞에 구겨진 갓을 쓰고 꾀죄죄한 도포를 입은 파락호가

박 대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떼를 썼다.

하인의 전갈을 받은 박 대인이 펄쩍 뛰며 버선발로 대문까지 뛰어나갔다.

“이게 누구요, 승열이 형 아닌가!”

“박팔목이!”

두 사람은 끌어안고 팔짝팔짝 뛰었다.

승열이는 부모상을 치르고 나서 노름판에 빠져 그 많던 살림 다 날리고

남은 재산 요리조리 팔아치우다가 이제는 끼니 걱정까지 하게 돼

소문의 끈을 잡고 머나먼 제물포로 팔목이를 찾아온 것이다.

둘은 날마다 요릿집으로, 기생집으로 주지육림 속에 빠져 옛날을 그리며 떠들고 웃었다.

보름만에 “승열이 형, 이제 집으로 가시오.”라며 팔목이가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승열이가 작별인사를 하고 제물포를 떠나 부지런히 걷다가 주머니를 열어보니

“애게~.” 엽전 백 냥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노잣돈밖에 안되는 것이다.

승열이가 구시렁거렸다.

“기생집에 뿌린 돈, 나를 주지.”

터덜터덜 걸어 집에 왔더니 웬 곡소리가 요란했다.

“여, 여, 여보, 어제 당신이 객사했다고 관을 보내왔어요.”

아이들이 승열이 도포자락에 매달렸다.
관을 열었더니 돈이 끝없이 쏟아졌다.

 

 

 

# 사랑방이야기(104) 눈 오는 삼거리


동짓달이 되면 천석꾼 부자 배진사댁 사랑방은 법석거린다.

배진사는 양반으로 학식이 높고 부(富)도 넘치지만 가슴은 차갑다.

그래서 배진사 집에서 한 해 머슴살이를 하고 나면 새경을 받아 떠나버리는 게 다반사다.

부창부수라, 안방마님도 대갓집에서 시집와 조신하지만 인정머리가 없다.

몸종·찬모가 툭하면 나가버리는 것이다.

배진사가 면접을 하다가 한 부부를 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삼십대 중반의 남자는 건장한 몸에 수염이 덥수룩했고, 마누라는 얌전하지만 미모가 빼어났다.
“여기 오기 전에 무엇을 했는고?”
“한양 북촌 성대감댁에서 행랑아범을 했고,

집사람은 노마님의 몸 수발을 들며 주로 지압과 안마를 했습니다.”

보료에 비스듬히 기대 있던 배진사가 상체를 일으키며 반색을 했다.
“그거 잘됐네. 내가 허리가 안 좋은데 지압을 받으면 좀 낫겠는가?”
털보 서방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을 못하자 “남녀 몸이 다를 바 없습니다.

”라며 마누라가 당돌하게 나섰다.


“자네는 글을 깨쳤는가?”
배진사가 묻자 털보가 대답했다.
“어릴 때 조부님에게 동몽선습과 사자소학을 배웠습니다.”
“그래?!”


배진사가 크게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우리집 살림을 맡아 집사로 일하게.”
배진사는 털보 내외의 살림집을 대문 코앞에 마련해줬다.

털보가 치부책을 손수 만들어 곳간 재고량, 전답 목록, 소작인 인적사항 등을 엮어 배진사에게 보였다.

배진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만족했다.
털보 마누라는 지압을 아주 잘했다.

지압을 받고난 배진사는 “내 몸이 날아갈 듯하네”하면서 주머니에서 한 냥을 꺼내 털보 마누라에게

쥐어줬다.


배진사가 털보 마누라를 부르는 횟수가 잦아졌다.

한번은 배진사가 엎드려 목 지압을 받다가 꿇어앉은 털보 마누라의 터질듯한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별 반응이 없어 이번엔 슬슬 주무르기 시작하자 털보 마누라가 배진사의 손목을 잡아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그날은 두 냥을 집어주자 털보 마누라는 배시시 웃으며 나갔다.

다음날부터 엉덩이를 만지는 것은 예삿일이 되고 손은 털보 마누라의 치마 밑으로 드나들기 일쑤였다.

안방마님에게 털보 마누라는 눈엣가시다.

배진사가 지압을 받고부터는 두 달이 지났는데도 안방으로 발걸음조차 없는 것이다.
하루는 안방마님이 사랑방으로 배진사를 찾아가 말했다.
“나리, 글피가 친정 아버님 생신입니다. 함께 가셔야겠지요?”


그러자 배진사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부인만 다녀오시오. 나는 허리가 아파 걷지도, 말을 탈 수도 없다는 걸 부인이 잘 알잖소.”
배진사는 집사를 장터에 보내 비단 한 필·육포·청주·갈비 등을 구해오라 시킨 뒤 장 본 것을

말 등에 실어 부인을 친정에 보냈다.

말고삐는 털보 집사가 잡았다.

오십리 밖 처갓집에서 부인과 집사가 돌아오는 날은 사흘 뒤다.

홀가분한 첫밤이 찾아왔다.

지압을 하러 사랑방을 찾아온 털보 마누라의 분 냄새에 벌써 배진사의 하초는 뻐근해졌다.

허벅지 지압을 받다 말고 배진사는 벌떡 일어나 돈 꿰미를 치마폭에 던져주고 후~ 촛불을 껐다.


광란의 밤은 오경(五更)이 되어서야 끝났다.

둘째날 밤도 털보 마누라를 발가벗겨 눕히려는 순간,

콰당탕 문이 열리며 시퍼런 낫을 든 털보가 신발을 신은 채 들어왔다.
“국법에 간부(姦夫)는 현장에서 쳐죽여도 죄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가!”
털보의 목소리가 산천을 울렸다.

배진사는 목숨을 건진 대신 거금 천 냥을 털보에게 바쳤다.

이틀 후 안방마님이 친정에서 돌아왔다.

털보 마누라가 마님을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마님, 쇤네는 다 알고 있습니다. 제 남편하고 마님이 몇 번이나 동침을 했는지.”
마님의 얼굴이 새하얘지며 말 한 마디 못했다.

털보 내외는 배진사댁을 하직하고 나왔다.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남촌댁, 안방마님한테 얼마를 뜯어냈소?”
“패물함을 몽땅 털었지요.”
털보가 말했다.


“우리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가시버시로 살면 어떻소, 남촌댁?”
“그런 소리 마시오. 조강지처를 버리고 잘되는 사람 없소.

아이들과 마누라 선물 사서 빨리 집으로 가시오.

나는 한의원에 가서 산삼과 녹용을 사서 드러누워 있는 우리 남편을 일으켜 세울 참이요.”

삼거리에서 둘은 갈라섰다.
“또 좋은 건 있으면 연락주시오.”
남촌댁이 고개를 돌려 또렷하게 말했다.

 

 

 

 

# 사랑방이야기(105) 노응대감


노은(魯銀)대감은 임금을 모시고 한평생 궐내에서 승지로 봉직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해

사랑방에 진을 치고 향리의 선비들과 고담준론을 나누고 술잔을 돌리며 세월을 낚고 있다.
자주 어울리는 사람은 청죽(靑竹)대감이다.

청죽대감으로 말하자면 죽마고우이자 같은 서당을 다니던 동창으로 함께 급제하여

나라의 녹을 먹다가 낙향한 사이.

청죽대감의 여동생이 노은대감의 부인이 되었으니 처남 매부지간도 된다.

노은과 청죽은 그렇게 친하면서도 성격은 딴판이다.
청죽대감이 얌전한 샌님인데 반해 노은대감은 화통한 한량이다.

노은대감은 술을 좋아하고 풍류를 즐기고 특히나 여자를 후리는 데는 도가 텄다.

한평생 치마폭에 싸여 살아온 것도 모자라 오십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 버릇을 못 고치고 있다.

사실 노은이 여자를 후린다기보다 여자들이 노은만 보면 꼬리를 친다는 말이 더 맞겠다.

팔척장신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떡 벌어진 어깨에 목소리 또한 우렁찬 데다

여자를 다루는 솜씨도 빼어났다.

이날 이때껏, 수없이 많은 치마를 벗겼지만 말썽 한번 생긴 적이 없었다.

수없이 새로 만나고 수없이 헤어져도, 이를 갈며 뒤돌아가는 여인이 없었던 것이다.

노은대감은 잘난 여자, 못난 여자, 늙은 여자, 젊은 여자, 양반, 천민 가리지를 않았다.

그렇게 바람을 피우면서도 조강지처를 소홀히 대하지도 않는다.

허나, 세월은 속일 수가 없었다.
사십대까지만 해도 바깥에서 그토록 여자를 품고도 집에 오면 안방으로 들어가는 걸 잊지 않아

조강지처 얼굴에 화색이 돌았는데, 오십 줄에 들어서자 자연히 안방 출입이 드물어져

부인의 눈치를 보는 처지가 되었다.
노은대감의 친구이자 손위 처남이 되는 청죽대감은 허우대가 볼품없는 데다 주색을 멀리하고

한평생 추구해 온 실학(實學)에 몰두, 한 마지기 밭에 양계장을 차렸다.

닭의 혈통을 개량해 가가호호에 우량종을 분양하겠다는 것이다.

눈이 펄펄 내리던 어느 포근한 날.

노은대감은 부인과 손을 잡고 눈 오는 산천경개를 둘러보러 가다가 청죽대감의 양계장에 들렀다.
“어서 오시게~”
청죽대감이 활짝 웃으며 노은대감 부부를 맞았다.



청죽대감이 이곳저곳을 안내하다가 장난기가 발동했다.
“저기 저 노응대감을 한번 보게.”
홀로 홰에 버티고 서 있는 우람한 장닭을 가리켰다.

노은대감이 깜짝 놀라자 청죽대감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저 장닭은 늙을 노(老)에 매 응(鷹)자, 노응대감이라네.”
자신의 이름을 빗댄 닭 이름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노은대감은 꾹 참았다.

청죽대감의 설명이 이어졌다.
“저 노응대감의 풍채를 한번 보게.

 

눈과 부리가 매를 닮았지 뭔가.

더구나 닭으로서는 노년기에 접어든, 인간으로 치면 오십 줄에 접어든 놈이

하루에 서른 번씩이나 암탉을 올라탄다오.”

청죽의 여동생이자 노은의 부인이 생긋이 웃으며 눈을 흘겨 노은대감을 향해

“대감, 들었어요?” 하자 그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노은대감이 청죽대감에게 물었다.
“저 노응대감은 한 암탉에만 올라탑니까?”

한 방에 청죽대감과 부인의 입을 꿰매버렸다.

 

 

 

# 사랑방이야기(106) 장모의 가출


고서방은 또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했다.
저녁나절 장에 갔다가 사립문을 열고 집에 들어오니 처마 밑에 낯익은 여자 신발이 놓여 있는 것이다.

장모님 신발이다.

또 장인어른과 싸우고선 딸네 집에 온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 “장모님 오셨어요.” 인사를 하자 장모는 “고서방, 눈치 없이 또 왔네….”라며

겸연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예전 같으면 “아닙니다. 장모님 제 눈치를 보시다니요.” 하면서 환하게 웃었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일년에 서너 차례 보따리를 싸서 딸집으로 오니 고서방 내외는 미칠 지경이다.
고서방은 무뚝뚝하게 말 한 마디를 건네고 장모님이 거처할 건넌방에 군불을 지피러 나갔다.

군불을 한참 지피고 있는데 안방에서 모녀간에 뭔가 토닥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장모님이 안방 문을 열고 나왔다.

“엄마 어디가?” 라며 고 서방 마누라가 따라 나오자 장모는 “내 걱정하지 마라.” 잡은 손을 뿌리쳤다.


모녀가 말다툼을 하는 것은 뻔할 뻔자다.

장모님은 장인어른과 싸운 연유를 설명하며 욕을 퍼붓고 고 서방 마누라는 그 정도도 참지 못하는

제 어미를 탓하자 장모님이 발끈 일어선 것이다.

군불 때던 고 서방이 일어나 장모를 뒤에서 잡아 건넌방으로 집어넣었다.


그날, 고 서방은 장에서 맷방석 열다섯 개를 다 팔아치우고 술 한잔 걸치고 집에 왔다.

저녁 수저를 놓고 나면 마누라 치마를 벗기고 요란스럽게 일을 한번 치러야 하는데

숨소리까지 다 들리는 건넌방에 장모가 있으니 난감하고 화가 치민다.


에라 모르겠다, 그가 마누라를 껴안자 마누라는 말은 못하고 서방의 가슴팍을 떼밀었다.

속치마를 올리고 고쟁이를 내리려하자 마누라가 손등을 꼬집으며 몸을 오므렸다.

이불을 덮어쓰고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마누라는 워낙 감창이 큰 체질이라 별 소용이 없었다.

될 대로 되라며 방구들이 내려앉을 듯 합환을 했다.

 

고서방이 정신을 차리고 요강을 찾아 살며시 방문을 열고 나가자 건넌방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고서방 오줌발 소리에 건넌방이 조용해졌다.

이튿날, 장모는 문을 걸어 잠그고 아침도 안 먹겠다고 했다.

그렇게 닷새가 지났다.
이십 리 밖에서 장인이 찾아왔다.

장모는 죽어도 안 가겠다고 앙탈을 부렸다.


장인은 “여보~, 이제 그만 우리 집으로 갑시다.” 잠긴 문 밖에서 몇번을 부르다가 돌아갔다.

한번 찾아오고, 두 번, 세 번을 찾아와야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서는 장모의 버릇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이틀 후에 장인이 또 찾아왔다.

고서방이 맷방석을 짜다 말고 장인의 팔짱을 끼고 동구 밖 주막으로 갔다.

술이 얼큰히 오르자 슬며시 말을 건넸다.
“장인어른, 이제 찾아오지 마십시오. 한 열흘 못 참으세요?”
고서방이 몰아붙이자 술잔만 들이켜던 장인이 천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 나이 서른넷이네, 요즘은 겨울이고.”
하기야 농부들에게 봄·여름·가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저녁 수저만 놓으면 쓰러져 코를 고는 계절이다.

그러다 할 일 없는 겨울이면 농번기에 못한 것을 벌충이라도 하듯, 마누라 치마를 벗기는 법이다.
“장인어른, 남자만 겨울이 좋은 줄 아세요? 여자도 마찬가지예요.”

장인은 주막에서 나와 제집으로 갔다.

이틀 후, 저녁상을 치우고 나서 장모에게 말했다.
“장모님, 올해는 맷방석이 잘 팔려 가을에 땔감 준비를 충분히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저희 안방에서 함께 주무시지요.”


고서방이 치마 두 개를 꺼내 끈으로 연결한 다음, 양쪽 끝을 이벽 저벽에 묶으니 칸막이가 되었다.

아랫목은 장모님 자리, 윗목은 고서방 내외가 차지했다.
호롱불을 끄자마자 고서방 내외는 부스럭부스럭 옷을 벗었다.

곧이어 쪽쪽 소리가 나더니 황소가 뻘 밭을 지나가는 소리, 암고양이 울음소리,

당나귀 짐 싣고 고개 오르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게 아닌가.

이튿날, 날이 새자마자 장모는 딸 내외의 얼굴도 안 본 채 제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장인은 사위 고서방이 귀띔해준 대로 장모를 본체만체 잠을 잤다.

장모가 장인에게 잘못했다며 항복한 건 삼일 후였다.

장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모의 치마끈을 풀었다.

아침에 장인은 코피가 터졌다.
장모는 두 번 다시 보따리를 싸서 딸네 집에 가지 않았다.

 

 

 

# 사랑방이야기(107) 주막


장날 저녁나절, 다섯 살 아들 손을 잡고 장터에서 돌아온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어머님,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하는데 시어머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섯 살 손자가 솜을 두둑이 넣은 비단 바지에 공단 조끼를 사 입고 깨엿을 먹으면서 들어온 것이다.
“할머니도 깨엿 하나 먹어.”


삼대 독자 손자 녀석이 주는 깨엿을 받아들고 할머니는 목이 메어 말 한 마디 못했다.
밤이 되자 시어머니는 고양이 걸음으로 며느리 방문 밖에서 귀를 기울였다.
“엄마 왜 울어?”
“아니야, 감기가 걸려 눈물 콧물이 나는구나.”

손자 녀석이 잠이 들었는지 조용해지자 며느리의 흐느낌이 시작되었다.

이튿날 아침, 부엌문을 열어도 며느리가 보이지 않고, 방문을 열어도 마찬가지다.

바람난 며느리는 기어코 야반도주를 한 것이다.

며느리가 시집와 신혼생활에 깨가 쏟아지는가 했는데 새신랑 아들이 잔칫집에 다녀와

토사곽란을 하더니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며느리는 청상과부가 되어 유복자를 낳았다.

이삼 년은 자식 키우는 데 온 정성을 쏟더니 그 후로는 독수공방에 몸부림했다.

결국 뒷집 머슴과 눈이 맞았다.

며느리와 뒷집 머슴은 그날 새벽에 만나 나루터에 가서 첫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사흘 만에 백 리 남짓 떨어진 대처에 닿았다.

며느리의 패물과 머슴이 몇 년 모은 새경으로 장터 근처에 조그마한 집을 마련했다.

 

어깨가 떡 벌어진 스물다섯 총각과 이제 스물둘밖에 안된 청상과부가 함께 있으니

긴 세월 참았던 욕망이 밤이고 낮이고 터져 나왔다.
한 달쯤 지나자 끝없이 솟아오르던 욕망의 빈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욕망의 끝엔 허전함이 뒤따른다.

섣달 그믐날이 가까워오자 부모들이 아이들 손을 잡고 장터로 나와 깨엿도 사고 때때옷도 샀다.

백 리 밖 시집에도 그믐날 밤이 왔다.
“그믐날 밤 잠을 자면 눈썹이 새는 법이야 이렇게.”
할머니는 만두를 빚으며 밀가루를 눈썹에 발랐다.

호롱불 아래서 손자를 웃게 하려고 할머니가 흰 눈썹을 만들었지만 손자는 웃지 않았다.


“저 소리!”
그때 손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엄마~”
할머니가 얼어붙었다. 손자가 대문을 열자 며느리가 들어왔다.

 

셋은 부둥켜안고 눈물바다를 이뤘다.
“어머님도, 우리 동우도 보고 싶었어요. 어엉엉~”
“그래그래 잘 왔다 에미야. 동우가 엄마 찾을 때 내 가슴이 찢어졌다.”


“아버님 병세는 어떠세요?”
“소갈병이 냉큼 낫는 병이 아니지.”
집안에 웃음꽃이 피었다. 아들은 까불고 깔깔 웃고,

며느리는 아들을 금이야 옥이야 꼭 껴안고 잤다.

꽃 피고 새 우는 봄이 왔다.

그런데 며느리에게 또 춘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떡판처럼 넓은데다 털이 숭숭 난 머슴의 가슴 품에 안기고 싶어진 것이다.

어느 날, 장옷을 덮어쓰고 외출했던 시어머니가 저녁나절 돌아와 며느리를 앉혀놓고

상상하지 못할 말을 했다.


“에미야. 나루터 주막이 우리 것이 되었다.

돈을 빌려줬다가 돌려받지 못하고 주막을 떠맡았어.”
“주막을요?”


“우리 집안이 양반도 아니고, 뭐 욕할 사람도 없을 거다.”
며느리가 난데없이 주막집 주모가 됐다.

닷새는 주모가 되었다가 이틀은 집에 와서 아들 동우를 얼싸안았다.

그 이틀은 시어머니가 주모가 되는 것이다.

주모라는 게 그런 것 아닌가.

객들이 주는 탁배기도 한잔씩 받아 마시고 객들이 엉덩이를 툭툭 쳐도 웃어넘기는….
어느 날 밤, 며느리 주모는 덩치 큰 소장수에게 짓눌려 회포를 풀고 나서 무릎을 쳤다.

이것이 모두 시어머니의 뜻이라는 걸!
시어머니가 주막에 오고 며느리는 집으로 돌아간 어느 날, 눈이 펑펑 쏟아졌다.

 

삼십대 중반쯤 되는 선비가 주막에 들어와 갓을 벗고 눈을 털었다.

선비가 저녁상을 들고 들어간 시어머니 주모의 엉덩이를 치자 깜짝 놀라 부엌으로 도망쳤다.

시어머니는 얼굴이 빨개지고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었다.


‘내 몸에 아직 춘정이 남아 있단 말인가?!’
시어머니에 손자를 둔 할머니지만 이제 나이 마흔하나.

남편이란 게 소갈병으로 마누라 치마를 벗긴 게 십오 년 전!

눈이 하염없이 내린 그날 밤, 시어머니는 한없이 흐느꼈다.

 

 

# 사랑방이야기(108) 무악재 나무장수


으스스 찬바람이 불어올 때면 한양도성 사람들의 발길은 자하문 밖 무악재로 향한다.

무악재 양편엔 장작이 무더기무더기 쌓여 있다.

수월댁도 눈과 코만 내놓은 채 장옷을 둘러쓰고 무악재에 다다랐다.

솔잎만을 모아 반듯하게 만든 솔가리, 통나무 가운데를 쪼갠 장작을 둘러보다가

눈길이 꽂힌 곳은 떠꺼머리 총각이 지키고 있는 통나무 바리다.
수월댁이 총각을 향해 “이 통나무는 대들보로 파는 거유? 아니면 땔감이유?” 물으며

배시시 웃자, 총각이 대답했다.


“원하는 대로지요, 마님. 발가벗고 목간하는 목간통도 만들 수 있고요.”
“어마나!”
수월댁은 장옷으로 얼굴을 가렸다.
흥정이 이루어졌다.

통나무를 수월댁 뒤뜰에 부려 놓고 이튿날부터 총각이

도끼질을 해주기로 하고 육십 냥에 합의했다.

이튿날 총각은 날이 선 도끼를 들고 와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총각, 탁배기 한 잔 들고 하시오.”
새벽엔 살얼음이 얼지만 초겨울 햇살은 따스했다.

북어초절임 안주를 들고 오던 수월댁은 윗도리를 벗은 채 일하는 총각의 근육을 넋을 잃고 바라봤다.
총각이 탁배기 사발을 단숨에 비우고 나자


“어마나, 내 정신 봐라. 젓가락을 안 갖고 왔네. 손 방금 씻었소.” 하며

수월댁이 두 손가락으로 북어초절임을 집어 넣어줬다.

입안에 초절임을 넣고 손가락을 빼지 않자 총각은 꿀을 빨듯이 수월댁의 손가락을 하나씩 빨았다.

“마님, 보통 장작 사러 오는 사람은 바깥 나리인데 어찌 안방마님이 직접 오셨소?”
“나리는 의금부 도사로 근무 중이니 내가 갈 수밖에. 그나저나 총각은 왜 아직도 장가를 안 갔어?”
“돈을 좀 모아야 색시를 구하지요.”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다 수월댁은 방으로 들어갔다.

수월댁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 뚫어 놓은 들창 구멍에 한쪽 눈을 갖다 댔다.

들창 바깥에는 아궁이 재를 부어놓은 거름 무더기가 젖무덤처럼 솟아있다.

거름 무더기를 보려고 수월댁이 들창 구멍에 눈을 박는가.

아니다.

총각이 앞마당 구석에 있는 통시까지 가기 싫어 바로 옆에 있는 거름 무더기에 오줌발을 갈기는 것이다.

총각은 거무튀튀한 물건을 꺼내 살수하듯이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삼일째, 마지막 날.
쌓아 놓은 장작을 무너뜨리며 수월댁이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이게 뭐요. 이게, 참나무란 말이요?”
총각이 멍하니 서 있자, 수월댁의 목소리는 한층 높아졌다.


“양두구육(羊頭狗肉)일세! 눈에 보이는 것들은 전부 참나무더니만 안에는 잡목 투성이네!”
총각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무를 하다보면 잡목도 좀 섞이지요….”
둘은 옥신각신하다가 열 냥을 깎아 오십 냥에 합의를 했다.
수월댁은 배시시 웃으며 총각을 안방으로 끌어들였다.

개다리소반에 술상을 차려 놓았는데 탁배기가 아니고 머루주에 안주는 문어라!
“사흘 동안 고생했소. 한잔 하시오.”
총각이 술을 마실 동안 장롱을 열던 수월댁이 “이걸 어쩌나, 마흔 냥밖에 없네. 열 냥이 모자라….”
총각이 버럭 화를 냈다.


“열냥을 깎더니 또 깎을 셈이요?”
수월댁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오늘 밤 총각은 주머니가 두둑하니, 틀림없이 주막에 가서 삼패기생을 끼고 잘 거 아니야!

열 냥만 쓰겠어?”

총각에게 착 달라붙어 머루주를 따르며 “내가 군불을 너무 땠나?” 덥다며 옷고름을 풀었다.
총각은 ‘이 여자가 점쟁인가, 남의 속을 들여다보네.’ 생각하며 와락 수월댁을 껴안았다.
방구들이 꺼질 듯 방사를 치르고 나서 총각이 옷을 입으려 하자 수월댁이 총각을 얼싸안고 깍지를 꼈다.
“나리가 의금부에서 퇴청할 시간이 지났잖아요.”
“호호호 거짓말이야, 나는 과부야.”

수월댁을 뿌리치고 옷을 입던 총각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나도 속았소. 겉과 속이 딴판이잖소!”
수월댁이 눈이 동그래져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떠꺼머리 총각 말하는 것 좀 보소.
“마님은 비단옷을 입고 박가분을 발라 겉으로는 양귀비인데 가슴과 엉덩이는 축 처졌지,

배는 골골이 주름졌지.

 

그리고 남편이 있다고 왜 속였소?”
수월댁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 좋은데 남편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이야?”


총각 왈,
“유부녀와 과부의 값어치는 하늘과 땅이요.

과부라는 걸 알았으면 옷을 벗지도 않았지 뭐.”

총각은 다섯 냥을 받아 헛기침을 하며 집을 나섰다.

결국 해웃값으로 다섯 냥만 준 셈이다.

 

# 사랑방이야기(109) 고향

 

앞으로는 맑은 내가 흐르고 뒤로는 숲이 울창한 산을 병풍 삼아 청천리(靑川里)엔

오십 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때때로 새우젓장수와 방물장수 등이 동네를 한바퀴 돌아 나갈 뿐

외지 사람이 발 들여놓는 곳이 아닌데,

이상한 사람이 하루도 아니고 열흘이 넘게 이 외딴 산골에 죽치고 있다.


동구 밖 대처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조그만 주막에 보따리를 풀어놓고

아침나절 청천리로 올라와 맷방석을 깔고 앉았다.
그리고 새하얀 접지를 펼쳐놓고 벼루에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동짓달이라 눈이 쌓이지 않은 곳이 없고 북풍한설 강바람이 볼때기를 도려내는데도

중년을 넘겨 얼굴에 주름살이 잡히기 시작한 환쟁이는 소반만 한 접지에 쉼 없이 그림을 그렸다.


냇가를, 뒷산을, 동네 골목을, 팽나무를 그리고, 논둑에 앉아 동네를 그리고,

동네 어귀에 앉아 청천을 그렸다.
세필화라 하루 종일 한 장 그리기도 바빴다.
동네 사람들이 빙 둘러 구경하다가 그것도 시들해질 무렵

그 환쟁이는 두 번 다시 청천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보름쯤 지났을까.
마포 나루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서른여섯 칸

대궐 같은 집 앞에 환쟁이가 나타났다.
대문을 두드리자 행랑아범이 나왔다.
“어서 오시오. 나리께서 목이 빠집니다.”


환쟁이가 사랑방에 들어가자 벌써 들뜬 오 진사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빨리 펴 보게.”라는 독촉에 환쟁이는 죽통에서 두루마리 접지를 꺼내 한 장을 방바닥에 폈다.
술잔을 내려놓고 두 손을 짚은 채 뚫어져라 그림을 내려다보던 오 진사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져 그림을 적셨다.


환쟁이가 얼른 그림을 빼며 “먹이 번집니다요.” 하자 목이 멘 오 진사는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바로 저기 저 얼음판에서 친구들과 썰매를 타고 팽이를 돌리고, 푸하하하!

촐랭이는 모두가 말리는데도 썰매를 타고 저기 저쪽으로 들어가다가 얼음이 꺼져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됐지, 크크크.”


이 그림 저 그림을 보며 울다가 웃던 오 진사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주모한테 물어봤는가? 촐랭이 동익이는 어떻게 사는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삼 년 전에 몹쓸 병으로 그만….”
그는 대성통곡했다.

오 진사가 또 한 장의 그림을 보다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여름밤이면 저 바위 뒤에 숨어서 동네 처녀들 멱 감는 거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지.

저기가 동네 윷판이 벌어지던 곳이네.
호섭이는 말필 쓰는 데 도사였어.
여보게, 윤 화백. 호섭이는 잘 있던가?”

환쟁이가 작은 종이를 꺼내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예, 얼마 전에 손자를 봤더군요.
어른께서 알아보라고 소인에게 주신 친구 단자 스물여덟 중에

이승을 하직한 사람은 촐랭이를 포함해 여섯이었습니다.


덕배, 상기….”
오 진사는 소반에 술을 따라 올리고 고향을 향해 두 번 큰절을 하더니

머리를 방바닥에 박은 채 한없이 흐느꼈다.
청천리에서 내를 따라 삼십 여 리 내려가면 크고 작은 마을을 지나

관아가 자리 잡은 대처가 나온다.


관아 동헌에서 사또가 처음 보는 노승과 마주 앉아

오랜 시간 밀담을 나눈 뒤 헤어지며 스님의 손을 잡았다.
“그리 되도록 대사께서 힘써 주시오.”
보름 후 어느 날, 노승이 마포 나루터 언덕 위 오 진사집 사랑방에서 곡차를 마시고 있었다.


“껄껄껄. 진사 어른은 국사범이라 모든 걸 감안해도 삼 년은 옥살이해야 한답니다.”
그러자 오 진사는 감개무량한 어조로 말했다.
“삼 년이라고요? 해야지요! 십 년이라도 해야지요!”

오 진사는 젊은 시절 천하에 이름을 떨친 신출귀몰한 도둑이었다.
인근 열두 고을, 악랄하게 축재를 한 졸부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낸 탐관오리들치고

그에게 재물을 털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매관매직이 판치던 시절, 이 고을 저 고을 사또가 한양의 세도가에게 보내던 뇌물을

하도 많이 털어 얼토당토않게 국사범으로 몰려 방방곡곡에 방이 붙었었다.
‘천풍’이라 불리던 그 큰 도둑은 손을 씻고, 새까맣게 얼굴을 태우고 텁수룩하게 수염을 기르고,

돈을 주고 족보를 사서 오 진사로 다시 태어났다.


마포 나루터에서 청나라에 홍삼을 수출하고 경면주사를 수입해 어마어마한 거상이 됐다.
산천이 두 번이나 변한다는 이십 년 하고도 네 해!
오 진사가 고향 청천리로 돌아왔다.


온 동네 사람들이 둘러싼 동네 어귀에서 그는 땅바닥에 이마를 박고 흐느꼈다.
동헌에 다다르자 사또가 마당까지 내려와 두 손을 잡았다.
오 진사는 고을의 숙원사업인 세 군데에 돌다리를 놓으라고 거금을 내놓았다.
설이 닷새 남았다.


청천리 가가호호에 세찬으로 쌀 한 가마와 쇠고기 다섯 근씩을 돌리고

죽은 친구 여섯 묘소를 돌며 절을 하고 두둑하게 조위금을 전했다.
설과 보름을 고향 사람들과 지내고 제 발로 관아로 들어가 옥에 갇혔다.



# 사랑방이야기(110) 고향

 

앞으로는 맑은 내가 흐르고 뒤로는 숲이 울창한 산을 병풍 삼아 청천리(靑川里)

오십 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때때로 새우젓장수와 방물장수 등이 동네를 한바퀴 돌아 나갈 뿐

외지 사람이 발 들여놓는 곳이 아닌데,

이상한 사람이 하루도 아니고 열흘이 넘게 이 외딴 산골에 죽치고 있다.


동구 밖 대처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조그만 주막에 보따리를 풀어놓고

아침나절 청천리로 올라와 맷방석을 깔고 앉았다.
그리고 새하얀 접지를 펼쳐놓고 벼루에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동짓달이라 눈이 쌓이지 않은 곳이 없고 북풍한설 강바람이 볼때기를 도려내는데도

중년을 넘겨 얼굴에 주름살이 잡히기 시작한 환쟁이는 소반만 한 접지에 쉼 없이 그림을 그렸다.


냇가를, 뒷산을, 동네 골목을, 팽나무를 그리고, 논둑에 앉아 동네를 그리고,

동네 어귀에 앉아 청천을 그렸다.
세필화라 하루 종일 한 장 그리기도 바빴다.
동네 사람들이 빙 둘러 구경하다가 그것도 시들해질 무렵

그 환쟁이는 두 번 다시 청천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보름쯤 지났을까.
마포 나루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서른여섯 칸

대궐 같은 집 앞에 환쟁이가 나타났다.
대문을 두드리자 행랑아범이 나왔다.
“어서 오시오. 나리께서 목이 빠집니다.”


환쟁이가 사랑방에 들어가자 벌써 들뜬 오 진사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빨리 펴 보게.”라는 독촉에 환쟁이는 죽통에서 두루마리 접지를 꺼내 한 장을 방바닥에 폈다.
술잔을 내려놓고 두 손을 짚은 채 뚫어져라 그림을 내려다보던 오 진사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져 그림을 적셨다.


환쟁이가 얼른 그림을 빼며 “먹이 번집니다요.” 하자 목이 멘 오 진사는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바로 저기 저 얼음판에서 친구들과 썰매를 타고 팽이를 돌리고, 푸하하하!

촐랭이는 모두가 말리는데도 썰매를 타고 저기 저쪽으로 들어가다가 얼음이 꺼져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됐지, 크크크.”


이 그림 저 그림을 보며 울다가 웃던 오 진사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주모한테 물어봤는가? 촐랭이 동익이는 어떻게 사는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삼 년 전에 몹쓸 병으로 그만….”
그는 대성통곡했다.

오 진사가 또 한 장의 그림을 보다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여름밤이면 저 바위 뒤에 숨어서 동네 처녀들 멱 감는 거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지.

저기가 동네 윷판이 벌어지던 곳이네.
호섭이는 말필 쓰는 데 도사였어.
여보게, 윤 화백. 호섭이는 잘 있던가?”

환쟁이가 작은 종이를 꺼내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예, 얼마 전에 손자를 봤더군요.
어른께서 알아보라고 소인에게 주신 친구 단자 스물여덟 중에

이승을 하직한 사람은 촐랭이를 포함해 여섯이었습니다.


덕배, 상기….”
오 진사는 소반에 술을 따라 올리고 고향을 향해 두 번 큰절을 하더니

머리를 방바닥에 박은 채 한없이 흐느꼈다.
청천리에서 내를 따라 삼십 여 리 내려가면 크고 작은 마을을 지나

관아가 자리 잡은 대처가 나온다.


관아 동헌에서 사또가 처음 보는 노승과 마주 앉아

오랜 시간 밀담을 나눈 뒤 헤어지며 스님의 손을 잡았다.
“그리 되도록 대사께서 힘써 주시오.”
보름 후 어느 날, 노승이 마포 나루터 언덕 위 오 진사집 사랑방에서 곡차를 마시고 있었다.


“껄껄껄. 진사 어른은 국사범이라 모든 걸 감안해도 삼 년은 옥살이해야 한답니다.”
그러자 오 진사는 감개무량한 어조로 말했다.
“삼 년이라고요? 해야지요! 십 년이라도 해야지요!”

오 진사는 젊은 시절 천하에 이름을 떨친 신출귀몰한 도둑이었다.
인근 열두 고을, 악랄하게 축재를 한 졸부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낸 탐관오리들치고

그에게 재물을 털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매관매직이 판치던 시절, 이 고을 저 고을 사또가 한양의 세도가에게 보내던 뇌물을

하도 많이 털어 얼토당토않게 국사범으로 몰려 방방곡곡에 방이 붙었었다.
‘천풍’이라 불리던 그 큰 도둑은 손을 씻고, 새까맣게 얼굴을 태우고 텁수룩하게 수염을 기르고,

돈을 주고 족보를 사서 오 진사로 다시 태어났다.


마포 나루터에서 청나라에 홍삼을 수출하고 경면주사를 수입해 어마어마한 거상이 됐다.
산천이 두 번이나 변한다는 이십 년 하고도 네 해!
오 진사가 고향 청천리로 돌아왔다.


온 동네 사람들이 둘러싼 동네 어귀에서 그는 땅바닥에 이마를 박고 흐느꼈다.
동헌에 다다르자 사또가 마당까지 내려와 두 손을 잡았다.
오 진사는 고을의 숙원사업인 세 군데에 돌다리를 놓으라고 거금을 내놓았다.
설이 닷새 남았다.


청천리 가가호호에 세찬으로 쌀 한 가마와 쇠고기 다섯 근씩을 돌리고

죽은 친구 여섯 묘소를 돌며 절을 하고 두둑하게 조위금을 전했다.
설과 보름을 고향 사람들과 지내고 제 발로 관아로 들어가 옥에 갇혔다.

 

 

사랑방이야기 (111) 가출

하룻밤 객방지기 된 남정네 둘
초면의 어색함 술로 풀어보는데
동구 밖 주막에 허 진사가 들어섰다. 기운이 쑥 빠진 목소리로 평상 위에 털썩 주저 앉으며,

“주모, 술 한잔 주시오.”
몇순배 자작 술을 기울이더니,
“주모, 나 오늘 밤 여기서 유숙하겠소.”
“아니, 제집을 코앞에 두고 웬 객잠이오?”

“그렇게 됐소.”
한마디 던지고 객방으로 들어가니, 드넓은 객방에 단 한사람만이 구석에 벽을 등지고

기대앉아 달걀 로 멍든 눈을 비비고 있었다.

남정네 둘이 초면에 한방 신세가 되면 서로 어색하기 마련인데 그걸 풀어주는 건 술밖에 없다.
“역곡에 사는 우 생원이라 합니다.”

“허 진사라 합니다.”

우 생원이 한병, 허 진사가 한병을 사며 몇차례 술병이 들락날락하자 두사람은

하나하나 허물을 벗기 시작했다.

나이가 스물다섯 동갑내기라 쉽게 가까워진 데다 술잔이 오가며 남자의 자존심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둘 다 공통점이 있었다. 대과에 계속 낙방한 것이다.

허 진사는 열일곱에 소과에 합격해 천재 났다고 떠들썩했지만, 대과는 달랐다.
보는 족족 떨어지다가 이제는 포기해버린 상태다.
우 생원은 공부를 안해 보나마나이기에 노잣돈으로 놀다가 집으로 돌아갈 작정이다.
“내 인생 몇년 살지는 않았지만 과거 길에 들어선 게 후회되는 대목이요.”

우 생원의 한숨에 허 진사가 물었다.
“그게 우 생원 인생에 가장 큰 후회거리요?”
우 생원이 술 한잔을 들이켜더니,
가장 큰 후회거리는 아니요.”
“그럼 더 큰 후회거리는 뭐요?”

우 생원이 천장을 보며 골똘히 생각한다.
“열두살 때, 길에서 주운 돈주머니를 돌려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허 진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우 생원이 자기 인생 최대 실수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가난한 집안은 흥부네처럼 식구들이 많기 마련이다. 우 서방네 여덟째 아들이 열두살 적에

둑길을 걷다가 길가 풀숲에 빨간 무엇이 얼핏 보여 주워보니 묵직한 주머니였다.
얼른 품속에 감추고 두리번거리며 산속으로 들어갔다. 주위에 누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쪼그려앉아 주머니 끈을 풀었다.

“아~.” 쏟아져나오는 엽전들! 눈앞에 그동안 사고 싶던 깨엿·호떡·가죽신·쌀밥·고깃국이 어른거렸다.
그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지만 금세 마음이 어두 워졌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어머니한테 수없이 들어온 말이 목구멍을 막아 숨이 막힐 지경 이었다.
소년은 힘없이 타박타박 산에서 내려와 주머니를 주웠던 그 둑길에 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린 처녀는 울고불고 그 어미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둑길을 거슬러왔다.

소년은 일어서서 새빨간 돈주머니를 치켜들었다. 앳된 처녀는 소년을 으스러질 듯 꼭 껴안았다.
거기까지 얘기하고 우 생원은 벌컥벌컥 탁배기 잔을 단숨에 비웠다. 허 진사가 물었다.
그것이 왜 그렇게 후회되는 일이오?”
“그 열다섯살 처녀가 지금 내 마누라요.”
이듬해, 열세살이 된 우 생원은 무남독녀 그 처녀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꽤 잘사는 집에 데릴 사위로 들어갔으니 공부에 전념해 과거를 보고 싶은데 노랑이 장인은

우 생원을 머슴처럼 부려 먹었다.

주경야독, 그래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 하자! 그런데 그 앳된, 그 얌전하던 처녀가

밤만 되면 어린 신랑을 가지고 놀았다.

“과거는 무슨 놈의 얼어죽을 과거야. 아빠 엄마 돌아가시면 모두가 우리 차진데!”세살 연상의 마누라는 성깔도 보통이 아니었다. 주경야독이 아니라 하루도 빠짐없이

주경야색(晝耕夜色)이니 공부할 시간이 있나!

그래도 과거 때마다 과거 보러간다고 주경야색에서 해방되니 휴식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도 과거 보러가겠다니까 마누라가 주먹 으로 눈알이 빠지는 줄 알았소.
나는 그렇다 치고 허 진사는 어째서 집을 코앞에 두고 객잠이오?”

허 진사는 한숨을 푹 쉬더니,
“우리 어머니 음식 솜씨 없는 게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어놓았소.”
어린 허 진사가 먹어봐도 제 어미가 만든 음식은 엉망이었다.
김치라고 해놓으면 소태요, 장은 담가 놓으면 구더기 논이 됐다.
고을에 음식 솜씨 뛰어난 박박 얽은 도화 처녀가 있었다.


고을 원님댁 김치를 해주고 장도 담가줬다. 허 진사 아버지는 그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허 진사가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꼴에 매일 밤, 내 바지를 벗기고는 여성 상위로 자존심을 구겨놓아요.

김장 잘못하면 한겨울 고생, 장 잘못 담그면 일년 고생이면 되지만,
마누라 잘못 얻으면 평생 고생이라는 걸 울 아버지는 아직도 모르는구먼요! 으흐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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