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원문 해설 [第一 篇 學而]
논어 원문 해설 [第一 篇 學而]
제1 편 학이(學而) 논어의 각 편의 이름은 대개 첫 장(章)의 처음 두 글자 내지 세 글자를 취해 만들어졌다. 학이편의 학이라는 이름은 첫 장(章)의 子曰 學而時習之에서 子曰을 뺀 첫 두 글자에서 취해졌다. 이는 당시로서도 드문 일이다. 관중(管仲)의 저서라고 전해지는 『관자(管子)』 제 1편의 이름은 「목민(牧民)」인데, 이는 그 주제가 ‘백성의 육성’이었기 때문이고, 장주(莊周)가 썼다고 전해지는 『장자(莊子)』 첫 편의 이름은 그 주제가 ‘정신의 자유로운 비상’인 까닭에 「소요유(逍遙遊)」라고 붙여졌다. 논어와 같은 작명법은 『맹자(孟子)』에서 볼 수 있는데, 이는 다름아니라 맹자(孟子) 자신이 공자의 후계자를 자임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보충> 논어는 한 주제에 대한 체계적인 저술이 아니고, 제자들의 기억 속에 산재하여 있던 스승의 말씀을 논찬한 것이다. 따라서 각 편의 작명법에서 알 수 있듯이, 각 편끼리의 관계는 상호 독립적이며 한 편 안에서도 각 장들 또한 상호 독립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어의 첫머리에 이 말이 실린 것은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아마 제자들이 볼 때 이 말이 공자의 일생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닐까?
높은 이상과 학덕을 지녔으면서도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그가 만일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로 여생을 보냈다거나, 또는 세상을 등진 채 냉소로 일관했다면, 오늘날 인류의 사대성인의 하나로 추앙받는 공자가 있을 수 있었을까? 제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공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비록 세상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어도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꾸준히 학덕을 연마하여 자신을 완성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제자들과 함께하는 학덕의 연마는 그의 남은 삶의 중요한 목표이자 기쁨이었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간혹 그를 이해하고 찾아오는 벗들은 그에게 커다란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그는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의연하려고 노력하였고, 학덕의 연마와 간혹 찾아오는 벗들과의 교류 속에서 마침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2, 有子曰 其爲人也孝弟 而好犯上者鮮矣. 不好犯上 而好作亂者 未之有也. 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弟也者 其爲仁之本與.
<해설> 유자(有子)는 공자의 제자로 이름은 약(若)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 의하면 공자보다 43살 연하라고 한다. 효(孝)는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을 말하며(善事父母爲孝), 제(弟)는 형장(兄長)을 잘 받드는 것을 말한다(善事兄長爲弟). 남북조(南北朝) 시대 양(梁)나라 사람인 황간(皇侃)이 쓴 『논어의소(論語義疏)』에 인용된 위(魏)의 왕필(王弼)의 해설에 의하면, 자연스럽게 친애하는 것이 효(孝)요, 그 사랑을 남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 인(仁)이라고 한다.
진자는 드물다” <해설> 교언(巧言)은 말을 좋게 하는 것이요, 영색(令色)은 얼굴빛을 좋게 하는 것이다. 가드문 것이다.
剛毅木訥近仁―자로 27). 인(仁)은 가식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함을 일컫는 말이다. <참고> 같은 귀절이 양화 17에 보이며, 공야장 24에도 비슷한 글귀가 있다.
4,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였는가? 벗과 사귐에 신의를 다하였는가? 제대로 익히지도 못한 것을 남에게 가르치지는 않았 는가?” <해설> 증자(曾子)는 공자의 제자로 이름은 삼(參)이고 자는 자여(子輿)이다. 『사기』「중니 제자열전」에 의하면 공자보다 46살 아래라고 하며, 『효경(孝經)』의 저자라고 전해진다. 충 (忠)은 주자에 의하면, 온몸을 다 하는 것을 일컬는 말(盡己之謂忠)이니 성실함이요, 신(信)은 진실로 하는 것을 일컫는 말(以實之謂信)이니 신의(信義)다.
<해설> 도(道)는 치(治)로 다스리는 것이다. 황간의 『논어의소』에는 도(道)가 도(導)로 되어 있다. 천승(千乘)의 나라는 그 땅 안에서 말 4필이 모는 전차 1,000 대를 낼 수 있는 규모의 나라를 가리키며, 보통 주(周) 왕실에 의해 봉국(封國)을 받은 큰 제후의 나라를 뜻한다(천자는 萬乘, 대부는 百乘이라 부른다).
6, 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해설> 효제(孝弟), 충신(忠信) 중에서 충(忠)이 빠졌다. 대신 무리를 사랑하고, 어진 이를 가까이할 것이 추가되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仁)의 근저를 이룬다. 어진 이를 가까이하는 것은 자신의 덕을 높히기 위함이다. 문(文)은 고주(하안의 『논어집해』)에 인용된 후한(後漢) 시대 마융(馬融)의 설(說)에 의하면 옛사람이 남긴 글이다.
7, 子夏曰 賢賢易色. 事父母 能竭其力. 事君 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 學矣. <해설> 자하(子夏)는 공자의 제자로 성은 복(卜) 이름은 상(商)이다. 『사기』 「중니제자 열전」에 의하면 공자보다 44세 손아래라고 한다. 고주(古注)에 인용된 공안국(孔安國)의 해설을 따랐다. 치(致)는 위(委)로 다 맡기는 것이다. 학문이 불필요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논어 곳곳에서 공자는 배움의 중요함을 누차 강조하 고 있다.
라고 해석하는 일설(一說)이 소개되어 있다. 易色을 아주 색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賢賢易色은 부부의 도를 말한 것이라고 한다. 즉 공자가 부모, 임금, 친구에 대한 도리를 말하기에 앞서 먼저 인륜(人倫)의 시초인 부부 의 도리를 말한 것으로, 그 뜻은 “부인(婦人)을 얻을 때는 어진 덕(德)을 어질게 여기며(賢賢), 미색(美色)은 가볍게 여긴다(易色).”는 것이다.
표현이 있다.
8, 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해설> 주(主)는 중심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참고>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는 자한 24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해설> 신종(愼終)은 청(淸)의 유보남의 『논어정의』에 의하면, 부모의 장례에 예를 극진히 함을 일컬으며, 추원(追遠)은 부조(父祖)가 돌아가신 지 오래되어도 잊지 않고 추모하여 제사를 받드는 것을 말한다. 부모의 장례를 극진히 한다 함은 부모가 살아 계실 적에 효도를 다하는 것은 물론 돌아가신 후에도 잊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부조가 돌아가신 지 오래되어도 제사를 잊지 않는 것은 자칫 잊기 쉬운 먼 것조차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멀고 소홀히 하기 쉬운 것을 잊지 않고 정성껏 할 때, 그 덕이 멀리 백성에게까지 미쳐 자연히 백성의 인정이 두텁게 된다.
<보충> 공자가 살던 주(周)나라는 주왕실을 정점으로 하여 주로부터 분봉(分封)받은 각 제후국이 각각 지역을 나누어 지배하고 있었다. 각 제후국은 제(齊)나 송(宋)과 같이 주왕실과 성이 다른 제후국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주왕실과 혈연 관계에 있는 동성(同姓)인 희(姬)성의 제후국이었다. 주왕실과 제후와의 관계는 주왕실을 종가(宗家)로 하는 종법질서(宗法秩序)에 의해 결합되었다. 각 제후국의 기저에는 공통의 조상신을 모시는 씨족공동체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렇듯 주의 통치 제도는 혈연적 관계를 매개로 성립하였다. 따라서 부모의 장례와, 조상에 대한 제례 의식은 단순한 도덕적인 차원을 넘어서, 기저의 씨족공동체 뿐만 아니라 주왕실과 각 제후국을 유지, 결합시겨 주는 중요한 정치적 행사였다.
10, 子禽問於子貢曰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與 抑與之與. 子貢曰 夫子 溫良恭儉讓以得 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
<해설> 자금(子禽)은 성은 진(陳) 이름은 항(亢)이며 공자의 제자이다. 그러나 자공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자공은 성은 단목(端木), 이름은 사(賜)로 공자의 제자다. 공자보다 31살 손아래라고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기록되어 있으며, 변설에 뛰어났다고 한다(言語 宰我子貢―선진 2).
<보충> BC 7~6세기경부터 철기 문명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면서 주나라는 격변기에 접어든다. 사회의 기저를 이루고 있던 씨족공동체 내부에서는 계층 분화가 격렬히 진행되었고, 그에 따라 혈연에 기초한 공동체는 해체되어 갔으며, 사회적 경쟁에서 낙오된 수많은 사람들이 공동체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주의 동천(東遷, BC 770년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주나라 왕이 살해되고 수도를 낙양으로 천도한 사건) 이래 주 왕실의 권위가 상실되면서 각 제후국 간의 약육강식도 본격화하였다. 이렇게 공자가 살던 시대는 구사회가 해체되면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혼란이 점점 극심해지던 시대였다. 이 혼란 속에 신음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 혼란을 종식하고 보다 안정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까 고심하였다.
<해설> 그 뜻(其志), 그 행적(其行)은 아비의 뜻, 아비의 행적이다. 아비가 살아 있을 때에는 아비의 뜻을 살펴 받들고, 아비가 돌아가신 후에는 그 행적을 살펴 받든다. 아비가 죽은 후 삼 년 동안 아비가 하던 바를 바꾸지 말아야 효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淸)의 전대흔(錢大昕)이 『잠연당문집(潛硏堂文集)』에서 밝힌 설(說)에 의거했다.
<참고> 이인 20에도 비슷한 내용의 말이 있다. 자장 18에서는 맹장자가 부친의 가신을 바꾸지 않고 그 정치를 그대로 시행하였는데, 이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하기 힘든 일이라고 증자가 칭찬하고 있다. 行也. 작은 것이 다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하지 못할 것이 있다. 조화만 알고 조화에 치중하여 예로써 절제하지 않으면, 또한 행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조선 시대 숙종, 경종년 간에 예송(禮訟) 문제로 피비린내 나는 당쟁이 발발한 것도 예의 문제가 갖고 있는 포괄성, 정치성을 확인시켜 주는 한 사례이다. 주자는 예를 천리(天理)를 꾸며 나타낸 것(天理之節文)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예를 쓸 때 조화를 중히 여긴다고 하는 것은 예로써 구별되는 것들 사이의 모순과 갈등을 해소시키는 것이 예를 쓸 때 중요하다는 뜻이다. 예가 너무 엄격하면 형식에만 치우쳐 오히려 각박해진다. 따라서 서로간의 화합이 요구된다. 그러나 너무 조화만 강조할 경우 서로 간의 구별이 없어지고 질서가 무너진다. 그러므로 예로서 절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유자(有子)는 화(和)와 예(禮)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中庸)의 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3, 有子曰 信近於義 言可復也. 恭近於禮 遠恥辱也.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해설> 신(信)은 말의 신의, 즉 약속이고, 복(復)은 약속이 이행되는 것이다. 친(親)은 친한 사람, 종(宗)은 존경을 받는 것이다.
14, 子曰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참고> 위정 13, 이인 22, 24, 헌문 29에서도 군자의 말과 행동에 관해 말하고 있다.
15,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與.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 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해설> 貧而無諂 富而無驕는 가난하든 부유하든 자신의 본분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빈부(貧富)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貧而樂 富而好禮는 빈부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유로운 경지다. 옹야 9에서 안연이 가난 속에서도 학문하는 즐거움을 바꾸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경지를 말한 것이다.
기수의 물굽이 바라보니 푸르른 대나무 우거졌도다. 다산에 의하면 절(切)과 탁(琢)은 대강의 모양을 만드는 과정이고, 차(磋)와 마(磨)는 윤이 나게 정밀하게 다듬는 과정이다. 자공은 공자의 말에 시를 인용하면서 대답한다. 『시경』의 “끊고 다듬은 듯 쪼고 간듯이”라는 귀절이 본래 아름다운 재료라도 더욱 갈고 닦아야 한다는 의미입니까? <보충> 공자는 시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그는 아들인 백어(伯魚)에게 시를 공부하라고 하면서 시를 모르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不學詩 無以言―계씨 13), 시를 배우면 감흥을 나타낼 수 있고, 사물을 제대로 살필 수 있으며, 무리와 어울릴 수 있고, 불의를 원망할 수 있으며, 가까이는 부모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길 수 있으며, 새와 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양화 9). 그는 군자는 행동에 민첩하고 말은 부족한 듯 해야 한다고 하였다(君子 欲訥於言而敏於行―이인 24). 그러한 그로서는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직접적인 장황한 표현보다는 비유적인 간결한 표현이 더 유용하고 적절했을 것이다. 그리고 비유적인 표현은 직설적인 표현이 가져올 격심한 감정의 노출을 자제하는 효과도 있었다. 실제로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말들은 대부분 직접적이기보다는 비유적이고, 장황하기보다는 압축적이다. 그는 시가 그러한 비유적인 표현을 익히는 데 최상의 교재라고 생각하여 제자들에게 학습을 장려하였으며, 현재까지 전해진 『시경』도 그가 편찬한 것이라고 말해진다. 신약에 나타난 예수의 언행이 짤막하면서도 주옥 같은 비유로 가득찬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참고> 헌문 11에는 “가난하면서도 원망하지 않기는 어렵고,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기는 쉽다.”라는 말이 있다.
16,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해설> 군자는 자기의 허물을 근심할 뿐이다. 그러므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남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나 자신의 허물이다. 그러므로 근심한다. <참고> 이인 14, 헌문 32, 위령공 18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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