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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指導者. 大望

슬픈역사의 아픈 과거가 함께하는 조선제6대 임금단종

                                                    슬픈 역사의 아픈 과거가 함께하는 고장

 

2012년 6월23일 오늘은 영월 

단종 임금의 넋을 위로할겸 유배지 "청령포"와 단종릉을 다녀 왔습니다.

세종 임금의 큰아들 문종이 병약하지않고 건강해서 좀더 오래살았더라면

그의 아들 단종이 어린나이에 일찍 왕위에 오르지도 않고 안정된 정치에

기반이 흔들리지 않았을 터인데.

 

그만 삼촌 숙부인 세조에 의해 임금자리에서 쫓겨나고 한양서 멀리 유배를 떠나고

사약을 받고 죽어서도 시신이 영월 동강에 한동안 버려져 방치되었다는 사실에

권력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인간이 사악해야 했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단종임금 유배지 "청령포를 안내하는 광장이네요.

 

 

 

 

세종임금의 큰 손자 단종이 아버지 문종 이향이 아프고 병약하지만 않았어도 어땠을까?

자꾸 생각해보게 되는군요

세종이 4대 문종이 5대  단종임금이 6대 이어서

 

수양대군의 세조가 7대 조선의 임금이었다는 사실

우리 학창시절에 배운 기억이지요

 

영월 기차역이 우리네 건축 양식으로 특이하게 지어져 있군요. 

 

 

1450년 2월 세종임금이 돌아가시고 곧바로 큰아들 문종이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약2년정도 밖에 왕위에 있었던 관계로 그의 어린 아들 단종도 흔들리는

조정 정치 현실에서 피해자가 되고 말았으니

 

 

 

 

영월역 기차에서 내려 역 광장으로 나오면 방랑시인 김삿갓 유적지를 안내하는

김삿갓의 조형물이 반가이 맞아주고 있군요.김삿갓 본명 김병연

  

 

단종임금의 넋을 위로하고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두렵고 무서운 나날들 어떻게 이 위기를 헤치고 한양 서울로 돌아갈수 있을까

곰곰히 때를 기다렸을 단종 그의 생각으로 가득찼던 여행입니다.

 

 

세종의 큰아들이 문종 둘째가 수양대군 셋째 아들이 안평대군이 었으니

안평대군도 바로위 형인 수양대군에게 척살당하고 말았으니 세조는 어떤 인물이 었을지

그의무덤을 찾아가 보았는데 사악했던 그 수양대군 세조 임금도 땅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단종임금이 이 강물을 건너가 절해고도 육지인 천연감방.

유배지에 다 다 르게 됩니다.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릴때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수양을 꾸짖고

얼굴에 침을 뱉고 사라졌는데 어떤연유인지 금새 수양대군 세조의 아들이죽고

세조도 심한 피부병에 걸려 고생 고생 했다는 역사의 기록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제 배를타고 청령포 단종임금의 유배지로 향합니다.

옛날에는  나룻배로 뱃사공이 건너주었겠지요, 

 

 

어린단종임금을 생각하며 강물을 바라보니 강바람도 예사롭지 않았으며

무심히도 흘러가는 강물은 그 옛날 그물은 아닐지라도 

 

 

이렇게 여기왔을 불쌍하고 가엾은 나이어린 단종 임금을 바라보았으리라

강변에 무수한 돌 자갈밭을 걸어봐도 단종임금 생각 뿐이네요.

 

 

 

 

수시로 오가는 작은 나룻배를 타고서 유배지가 있는

강 저편으로 단종대왕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단종대왕은 12살 어린나이인 1452년에 임금에 오르고 2년후인

1454년 1살많은 송현수의 따님이신 정순왕후와 결혼을 하지만

 

 

금새이곳 영월로 유배오는 바람에 그때헤어져 영영 죽어서 무덤까지도

함께하지못하고 따로 멀리 떨어져 있으니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눈물의 나날들 고통의 나날들 어찌 말로 다 표현할수 있을까요

솔밭길 걸어 가노라니 통곡소리 울음소리 들리어 오네요.  

 

 

솔나무 바람한점에도 단종의 애환이 스며있는데 숙부인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 단종의 충신들을 죽이고 친동생 안평대군마져 가차없이

처단하니 피비린내나는 사건에서 단종대왕이 얼마나 부들 부들 떨었을지. 

 

 

솔밭길 청령포 걸어가고 있으면 또 떠오르는군요.

유배를 보내놓고 서울에 남겨진 그의 왕비 송씨는 궁궐에서 쫓겨나와

지금의  종로구 숭인동에 정업원에 거처하면서 여승이있는 청룡사에서

평생을 여승이되어 보내기로 하는데 애끓는 마음이 절절 합니다. 

 

 

유배지에 감금된 단종의 시녀들이 거처하던

초가집 한채에는 의복과 식사를 책임 졌을 테지요.

  

 

 

 

어쩌면 초가집 한채가 시녀들이 머물렀던 초가집과

마주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단종이 영월 유배지에서 사약받고 죽은후 200여년이 지난후에야

숙종임금의 배려로 단종 임금과 왕비 송씨로 복위되긴 했지만 그

들의 한 많은 삶을 그 무엇으로도 보상 할 수가 없겠지요.

  

 

영월에 유배중인 단종이 광풍헌 자규루에 올라 피를토하며 운다는 자규새에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지은 시입니다.


 

杜鵑詩(두견시)---단종(端宗) 조선6대임금      

 

   一自寃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한번 스스로 원통한 짐승이 되어 왕궁을 나왔으니

   孤身隻影碧山中 (고신척영벽산중) :외로운 몸 한조각 그림자는 푸른 산중에 있고야.

   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거짓잠(선잠)으로 밤마다 자는 잠 선잠마저 없으니

   窮恨年年恨不窮 (궁한년년한불궁) :다 할 수 없는 해마다의 원한은 끝이 없는 한 뿐.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장잔월백) :새벽 메 뿌리에 우는소리 없고 쇠잔한 달빛만이 밝다.

   血流春谷落花紅 (혈유춘곡낙화홍) :피 흐르듯 만발한 붉은 골짜기 떨어진 꽃잎도 붉다. 

   天聾尙未聽哀訴 (천농상미청애소) :하늘이 귀가 멀어 슬픈 호소를 듣지 못하는 가

   何奈愁人耳獨聰 (하내수인이독총) :어찌하여 수심(근심) 많은 사람의 귀에만 들리누나

 

두견이 우는구나 두견이울어 달밝은 밤에 하늘에 호소하는소리인가

땅에 호소하는 소리인가  하늘은 귀먹어 아직도 애소를 못듣는데 어

이하여 수인 (囚 人)의 귀만이 밝은고 

 

 

 

 

 단종의 침실 이 었다는군요.

아주 작고 초라해 보였습니다.

 

 

한양을 떠나 앞서 한강 광나루

그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떠나온지 7일만에 영월 유배지 청령포

이곳에 도착한 단종 대왕이 셨습니다

 

 

청령포는 3면이 강물로 막혀있고 뒤로는 절벽

바위산이니 천혜의 옴짝 달싹 못하는 유배지 이었네요.

 

 

배를 이용하지 않으면 나올수 없고 절벽에서 떨어지면

죽음이니 유배지 이곳 청령포 기나긴밤 두견새가 밤새

 

처량히도 울었으며 풀벌레 소리 바람소리 사나운 산짐

승들 배고파 우는소리 강물이 철썩 철썩 휘감어돌아 흘

 

  러가는 소리에  단종대왕은 감히 잠들지도  못하였네요.

 

 

 

 

가운데 보여지는 큰 소나무가 600여년된 단종의 슬픈 삶을

보았을 볼觀  소리音  觀 音 松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왕방연의 시한수가 생각나는 군요

 

 

 

천만리 머나먼 길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는데 저 물도 내안같아야 울어 밤길 예놓다.

 

 

이 소나무가 단종의 그때를 보았고 단종이 나무 아래서 통곡 하였답니다.

 

 

 

단종이 저 갈라진 소나무 사이에 걸터 앉아 많은 생각을 하고

놀기도 하고 그랬다고 전해져 오네요.

 

단종의 죽음에관하여 옛문헌 기록들을 잠깐 들여다봅니다.

세조실록에는 단종의 죽음이 자살로 기록되어 있구요

 

당연히 그렇게 썼을 테지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니까요

노산군(魯山君)이 스스로 목을 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 지냈다.

 

  

 

병자록 (丙子錄)에 단종 죽음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금부도사가 하는수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으니

금부도사가 대답을 못하였다.

 

통인 (通引) 하나가 항상 魯山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 당겼다.

 

그때 단종의 나이 17세 이었다.

통인(通引)이 미처 문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구명에서 피가 흘러 즉사 하였다.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고을 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고

이날에 뇌우(雷雨)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수 없었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 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아래사진은 단종이 강 절벽위에 멀리 한양을 바라보면서 망향에 젖어

돌탑을 쌓았다는 망향탑이 애처로웠다.

 

 

아성 잡설 기록에는 노산이 해를입자 명하여 강물에 몸을 던졌는데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가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

 

아전(衙前)의 이름은 잊었으나 그 아전이 집에 노모를 위하여 만들어 두었던 칠한 棺이

있어서 가만히 옥체를 거두어 염하여 장사지냈는데 얼마 안되어 소릉(昭陵)단종의 생모

현덕왕후)가 파 헤쳐지는 변이 있어 다시파서 물에 던지라고 명하였다.

 

아전은 차마 파지 못하고 파는 척하고 도로 묻었다.

넘실대며 흐르는 강물은 무심히 오늘도 흐르고 있건만

 

 

영남야어 기록으로는 노산이 항상 객사(客舍.관풍헌)에 있으므로

촌 백성들로써 고을에 가는자가 누(樓)아래에 와서 뵈었는데

害를 당하던 날 저녁에 또 일이 있어 官에 들어 가다가 길에서 만나니

 

노산이 백마를 타고 동곡으로 달려 올라가는지라 길가에 엎드려 알현하며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물엇더니 노산이 말하기를 태백산으로 놀러간다

하였다.

 

백성이 절하며 보내고 관에들어가니 벌써 害를 당하였다. 절벽아래

저 강물 흐르고 또 흘러도 단종의 옛눈물 지금 어디로 흘러갔는지

강물아 말좀 해 보려무나.

 

영월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옥거리 에 왕래하며 통곡하면서

관(棺)을 갖추어 이튿날 아전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군(郡)북쪽 5리

되는 동을지(冬乙旨)에 무덤을 만들어서 장사지냈다 한다.

 

이때 엄흥도의 족당들이 화가 있을까 두려워서 다투어 말리니 엄흥도가

말하기를 내가 옳은 일을 하고 害를 당하는것은 내가 달게 생각하는 바라고

하였다.

  

 

송와집기 기록에서는 노산이 영월에서 죽으매 棺과 염습을 갖추지 못하고

거적으로 초빈을 하였다.

 

하루는 젊은 중이와서 슬피울고 스스로 말하기를 이름을 통하고 구흘을

받은 정분이 있다.하며 며칠 묵다가 하루저녁에 시체를 지고 도망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산골에서 불 태웠다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江에 던졌다 하여

지금의 무덤은 빈 탕이요 가묘(假墓)라 하니

두 말중에 어느것이 옳은지 알수 없다.

점필재(畢齋 金宗植)의 글로 본다면 江에 던져 졌다는 말이 틀림없다.

 

그러면 그 중은 호승 양련의 무리로써 간신들의 지휘를 받은 자가 아닌가

영원히 恨이 그치랴  魂이 지금도 떠돌아 다닐 것이니 참으로 슬프도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 청령포 에 유배되었을때

                  엄흥도는 이 고을의 호장이 었다                     

 

               밤낮으로 단조의 거소인 청령포를 바라보며  무사하기를    

기원하던중 어느날 달 밝은 고요한 밤에 청령포  에서

슬프고 애끓는 비명의 곡성이 들려 오므로 황급히 강을 건너가 진배하니

 

단종은 울음을 멈추고 육지고도인 이곳 청령포에 유배된 이후 밤마다

꿈속에서 너를보니 육신을 상봉한것 같구나

그대는 실로 초야에 묻힌 선인이로구나 

                하며 반갑게 맞이 하였다.               

 

 

그 후 엄흥도는 매일밤 비 바람을 가리지않고 문안을 드렸으며

그해여름 큰 장마로 인하여 단종은 청령포 어소에서 영월읍 관풍헌

으로 침소를 옮기게 되었다.

 

객사동쪽에 있는 자규루 에 올라 자구시를 읊으면서 지내던 중 금부도사

왕방연 이 가지고온 사약을 받고 죽으니 그 시신은 동강물에 내 던져 지고

 

시녀는 동강절벽 (東江絶碧. 후일 낙화암)에서 투신절사 하였으니

이때가 매우 추운 겨울 이 었다.

 

 

엄흥도 호장(戶長)은

군수에게 성장(聖裝)을 청하였으나 世祖의 지시를 두려워 한 군수가 거절하자

엄흥도는 즉시 서강과 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대기 하였다

 

그리고 시신을 인양하여 아들 3명과 미리 준비한 관에 봉안하고 운구하여

영월군 서북쪽 동을 지산 의 선산에 암장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말리는 아들들에게 엄흥도는 나는 옳은일을 하다가 화를 입더라도 내가 달게 받겠노라

하며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취를 감추었다.단종이 이바위절벽에 앉아

많은 눈물을 흘렸던 노산대가 강 절벽 위에 이렇게 있습니다. 

  

 

서울 노량진에 사육신 묘소는

 

단종의 복위를 몰래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발각되었으니

그게바로 단종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결정적 사건이 되는데

 

성삼문.박팽년.하위지.유응부.이개.유성원. 6명

이들의 죽음도 원통하고 분하기는 매 한가지인 거지요.

 

노산대 강 바위 절벽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푸른 강물은

여전히 흘러 가고 었었습니다.

 

 

이직의 시한수 읽어 봅니다.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겉이검다고 속조차 검을소냐. 아마도 겉희고

속 검은 이는  너 뿐인가 하노라.

 

 

  노산대에서 바라본 단조의 망향탑쪽 강절벽

                                            산이 저기 보인다.                                                       

 

유응부 : 단종복위 운동의 주모자는 성삼문과 박팽년이다.

       나 유응부는 무인 출신으로 행동 책임자이다.

 

 

세조 너는 무슨일을 하려고 하였느냐 ?

박팽년 明나라 사신을 초청.연회하는 자리에서 내가 칼한자루로 족하를 죽이고

 

옛 임금을 복위 시키려 하였으나 간사한놈 (김질 밀고자)에게 고발 당하였으니

유응부는 다시 무슨말을 하겠소 족하는 나를 빨리 죽이시오

 

세조는 즉시무사를 시켜 박팽년의 살가죽을 벗기고 다시 심문하였으나

유응부는 끝까지 자복하지않고 오히려 성삼문을 향하여 소리 지른다.

 

사람들이 서생(書生)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지난번 내가 칼을 사용하려 하였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요 하더니 오늘의 화를 자초하고야 말았구나

  

 

 그대들처럼 꾀와 수단이 없으면 무엇에 쓰겠는가 족하는 만약 이 사실밖의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성삼문)에게 물어보라.

 

世祖는 더욱 화가나서 불에달군 쇠를 가져와서 그의 배밑을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 올랐으나  유응부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며 이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성삼문과함께 단종복위에 참여 하였던 김질의 밀고로 발각이되고

성삼문도 갖은 고초 끝에 새남터에서 죽는다.

 

그리고 온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하는데

아버지.세동생.네아들 모두 남은 가족도 없고 누구도 무서워

시체를 건드리지 못하다가 생육신 김시습이 노량진에 묻었다.

  

 

성삼문이 처형장에 끌려가면서 남긴 절명시

 

처형장의 북소리는 생명을 재촉하고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려  하는구나

황천 가는 길 에는 주점도  없다는데

  오늘 밤은  뉘 집에서  잠을  자 볼까. 

 

 

단종복위 운동하다 숨져간 성삼문의 또다른 시가 절절 합니다.

 

님의밥 님의옷을 먹고 입으니

일평생 먹은 마음 변할수가 있으랴

이 죽음이 忠 과 義 를 위함이기에

푸른 송백 꿈에서도 못잊으리.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에게 사약을 전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며 읆은 시조.

 

천만리 머나먼 길에 / 왕방연

 

천만리 머나먼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안 같아여 울어 밤길 예놓다. 

 

 

단종대왕이 잠들어 계신 묘소 장릉에서 두손 모아 기도를 올렸습니다.

 

  

 

왕릉을 지키는 문인석 . 무인석은

시커멓게 비 바람에 단단히 지켜주고 있었고

둘러쳐진 곡장에 혼유석 장명등도 바라보았습니다. 

 

 

편안히 잠드소서 가엾은 넋이여 영원토록 좋은 세상에서 영면 하시옵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2012년 6월 23일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