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三國志 (인간학)

蜀나라의 멸망.

일장검 2011. 7. 2. 21:38

                                                                     범상한 톱은 조직을 망친다.

 

                                                        諫言을 받아들이지않고 항복하다.

 

 

 

 

제갈공명이 죽은후.촉나라의 원정군이 철퇴하고 나서 얼마동안

 

사마중달은  장안에 머무르면서 촉나라의 움직임에 대비하고있

 

었읍니다.그후.전공에의해 태위(太尉)라는 무인으로서의 최고의

 

 

 

관위(官位)를 받았으며.안국향후(安國鄕侯)로 봉해져 나라의 최

 

고 원로로서 중용되었다.239년 명제가 죽고 태자방(芳)이 겨우 8

 

세로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그 사이에도 권모술수에 능한사마중

 

 

 

달은 온갖 수단방법을 구사해서 정적(政敵)과비판자를 차례차례

 

로 숙청해 나갔다.이렇게하여 251년에 그가 73세로 죽을때는.위

 

왕조는 사실상 사마일족의 손에 쥐어 있었다.사마중달 다음에는

 

 

 

사마사(司馬師).사마소(司馬昭)로이어졌는데.그들도 아버지의 유

 

훈(遺訓)을 계승하여 위왕조의 권력을 독차지 했다.265년에 위나

 

라의 마지막 황제인 원제(元帝)는.선양(禪讓)의 형식으로 황제의

 

 

 

자리를 사마중달의 손자인 사마염(司馬炎)에게 물려주었고.이로

 

써  진(晋)이라는 왕조가 생겼다.사마염은 이왕조의 진짜 창시자

 

는 할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사마중달에게 선제(先帝)라는 황제로

 

 

 

 서의  시호(諡號)를  붙였다. 촉나라는 이보다  2년전에 멸망했다.

 

제갈공명이  죽은후 군사면에서는 그 제자가되는 강유.내정면에

 

서는그가 극력 추천한 장완(蔣琬).비위(費褘)의 삼총사가 나라를

 

 

 

떠받들고 있었다.이 세사람은 전략가및 정치가로서는 당대 일류

 

의 인물이었다.그중에서도 특히 강유는 제갈공명이 유업을계승

 

하여  자주 위나라 영토를 출격해서 공격을 최대의 방어로 삼고

 

 

 

있었다.그런데 어쩔수없이 아두(阿斗)는 어리석은 2대째여서 모

 

 처럼의  훌륭한 인재를 보람있게  쓰지를 못했다.263년서부국경

 

 이  촉나라의  강유에 의해 자주 위협당하는데 화가난 사마소는.

 

 

 

장군 등애(鄧艾)에게 3만명의 기동부대를 주어 강유가버티고 있

 

는  한중을  피해 크게 우회하여 동남쪽에서 성도를 기습 공격케

 

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위군에.군사력이 허술한  성도는 큰 혼란

 

 

 

에 빠졌다.기절 초풍을 한 유선은 즉각 항복을 자청하려 했다.그

 

러자 아들인 북지왕(北地王)유심(劉諶)이 반대했다."설사 당하지

 

는 못할지라도 최후의 일전을 벌여 성을 베개삼아 죽을때까지 싸

 

 

 

워야 합니다.쉽사리 항복하다니 당치도 않습니다.그렇게 하면 저

 

승에서 할아버지를 뵈올 면목이 없단 말입니다.그러나 유선은 상

 

대하지않고 성문을열고 백기를 세운후투항했다.유심은 할아버지

 

 

 

유비의 무덤앞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톱의힘이 모든것을 결정한다.

 

 

 

유선일행은 포로가되어 위나라 서울로 끌려갔다.어느날

 

사마소는 잔치를 베풀고 유선을 위로했다.유선의 부하는

 

모두 먼  이국땅에  포로로 잡혀와 창피를 당하고 있는것

 

 

 

을 부끄럽게 여기고 조금도 웃지않았다.유선혼자만은 기

 

뻐하면서 떠들어대고 있었다.이것을본 사마소도 어이가

 

없어서 측근인가충(賈充)에게 속삭였다.전부터 저사람이

 

 

 

멍청이라는 말을 듣고 있었지만 이정도 일줄은 미처몰랐

 

다.이래가지고는 설사 제갈량이 살아 있었다 하더라도 촉

 

을 보전할수가 없었을것이다.그러자 가충은 말씀하신 대

 

 

 

로입니다.그렇지만 만약 유선이 저런 멍청이가 아니었다

 

면 아무리 영명하신 폐하시더라도 촉나라를 간단히 멸망

 

시킬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하고 대답했다.지

 

 

 

리(地利)와  생산성.혹은 인재의 면에서만 보아도 당시의

 

촉나라는 비록 영명한 승상 제갈공명이 죽고 없었지만 위

 

나라와  오나라에비해결코 손색이 없었다.아깝게도 톱인

 

 

 

유선이너무나도 믿음직 스럽지 못했다.그러기 때문에 망

 

한것이다.그후 유선이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사서에도 기록이 일체 없다.불쌍하다면 불쌍하지만 죽음

 

 

 

 을 기록할 가치도보람도 없는 바보 임금이었다는 것이다.

 

기업이든  나라든 톱이  범상(凡常)한곳은.설사 중역이나

 

장관이 아무리 우수하더라도.또 개개의 사원이나 국민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망한다.촉나라

 

의 멸망은 그좋은 예라고 할수 있다.

 

 

 

 

 

 

 

이렇게  해서 황건의  난이래  약1백년동안에 3개의 왕조가

 

성립되었으며.그리고 망해 버렸다.중국의 긴역사로 본다면

 

위.오.촉의 흥망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의 꽃" 에 지나지 않

 

 

 

았다. "나라는망했지만 산천은 옛모습 그대로있다. 수많은

 

영웅호걸들이.혹은 꿈을 다 이루지못한채 사라져갔고 혹은

 

풍운의 뜻을 이룬뒤에 남겨진것은  유구(悠久)한 중국의 산

 

 

 

천과 인간학의 노 하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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