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三國志 (인간학)

외척(外戚)의 횡포.

일장검 2011. 6. 22. 20:47

                                                     

 황제는 꼭두각시에 불과

 

전한. 후한을  통해  양 4백년간에 걸쳐 중국 대륙에

 군림했던   한제국  (漢帝國)  이 멸망한 다음  수(隨).

당(唐) 제국이  성립 되기 까지의 거의 2백년 가까운

 

 기간.  중국은  위(魏). 진(晋)남북조 시대라고 불리고

있는  대  분열의  시대를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대분열시대의 서막이 되었던 위의시대(220~265)

 

는 또 위(魏).오(吳).촉(蜀)의 3국이 정립(鼎立)하고있 

었던 시대이기도 했다.중국에서는 그 이전 춘추시대 

 말에 대국진(晋)이 중신인 한(韓).위(魏).조(趙).의 3씨 

 

 에  의해서 분할되었던 예가 있거니와.후한이 멸망한 

경우는 전혀 달랐었다.위나라의 시조가된 조조는.재 

상이 되고  신하로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을 때.

 

만약 나라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한제국은 벌써 망했

을  것이며.황제를 자칭하거나 국왕을 자칭한 사람이

몇명이나  나왔을는 지는  알수가 없다.고  말했었다.

 

 

 

 

정말 그말이 옳았으며.후한의 황실 유(劉)씨는 당연히

망해야  했기에 망했던 것이며.그 멸망의 원인은 내시

(內侍)를 중용(重用)했기 때문인것으로 되어있다.그리

 

고 후한이 내시의 화(禍)로 말미암아 자멸한 다음.한때

군웅할거의 전국시대가 나타났으며. 그난세를 이겨 남

은 3국이 대륙에 정립하고 있었던 불과 41년간이 소위

 

삼국 시대인 것이다. 후한은 일단 외척인 왕(王)씨에게

뺏겼던  한나라의  황통(皇統)을  광무제(光武帝)  유수

가 도로 빼앗아 중흥한 것인데 이후한도 반세기쯤지나

 

자  벌써  외척에게 권력을 뺏기고 말았다.그 외척의힘

을  배제(排除)하려고 한 황제가 내시를의지 했기 때문

에 이번에는 내시세력이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그리

 

고  이 내시의 횡포가 또한 후한을 멸망으로  이끌었던

 것이다.후한의 조정에서 내시가 권력을 잡은 것은 제4 

 대 의 화제(和帝)때 부터였다.황제이전의 3대의 황제가

 

즉위한 나이를 보면. 제1대 광무제가 30세(재위연수 32

년).제2대 명제(明帝)가 30세(재위18년).제3대장제(章帝

가18세(재위13년)로 모두 성인이 된다음에 즉위했기때

 

문에 황제의 권위를 유지하여 국가를 융성하게 할수 있

었다.

 

 

그러나 제4대인 황제에서 마지막 황제가된 제14대 헌제(獻帝)

까지는 모두어린나이로 즉위했으며.제5대 상제처럼 생후 1백

여일 이라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17세때 즉위한 제13대 폐

 

 제만  하더라도 외척인 대장군 하진(何進)에  의해서 옹립되긴

 했지만. 재위 5개월만에 무장 동탁에게 폐위.추방당하는 꼴을

겪었던것이다.그런데 황제가 10세에 즉위함과 동시에 조정의

 

세력은 생모인 두태후(竇太候)와 그 오빠인 두헌(竇憲)등이 잡

고 말았다.이에 반대한 관료는 두씨문중에서 보낸 자객에의해

살해되었다.황제는 대신들과 친히 만날 기회도 없었다.완전한

 

꼭두각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신뢰할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어릴때  부터  신변 에서  보살펴   주었던  내시밖에   없었다.

 

 

 

 

그 내시의이름은 정중이었다.정중은 황제의 유일한 옹호

자며,황제를 위해 외척들의 손에서 대권(大權)을 도로 뺏

기  위해 비밀리에 공작을 꾸몄다.영원(永元)4년 (92) 6월

 

 에 황제의  이름으로  두헌을 죽이고.그 일족을 숙청했다.

황제는 이때 14세였다.정중은 이 공로로 후작(候爵)에 봉

해  졌으며. 그때까지 후궁의 노예에 지나지 않았던 내시

 

가 정치에 개입하는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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